<사해문서와 쿰란 공동체>
사해문서와 쿰란 공동체
박정아 율리아
들어가는 말
사해문서의 발견은 단지 2,000년 전에 있었던 어느 한 단체에 대한 지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남지 않는다. 사해문서들이 씌어진 배경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서시대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해문서의 발견은 2,000년 전 예수 시대에 대해 큰 단서를 주는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사해문서가 무엇이며 이 문서와 연관되었으리라고 보는 쿰란 공동체의 모습을 정리하면서 2,000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의 종교적 상황과 초기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사해 문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또는 사해사본은 1947년부터 이스라엘 사해(Dead Sea)지역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아람어, 또는 그리스어로 씌어진 고대 문서들을 말한다.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을 지칭하는 사해문서는 좁은 의미로는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쿰란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의미하고, 이 사본들은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필사된 것들이다.
넓은 의미로는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트, 나할 헤베르, 나할 세일림 그리고 나할 미쉬마르 등 사해주변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 모두를 총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사해 문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티나 침공(BC 332)부터 로마에 대한 유다항쟁(AD 66-73)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유다인들은 헬레니즘과 정면 대결하였고 제 2성전시대라고도 하는 제2연방국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놓았으며, 국가의 정체성을 마련하였다. 사해문서는 이러한 역사, 문화적 배경 안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사해문서는 BC 168-164년 사이에 일어난 마카베오 항쟁과 예수 탄생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중요한 문서들이다.
1) 사해 문서의 발견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정확한 일자와 경위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1947년에 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1947년 봄 베두인족 소년(무하마드 아드-디브)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서 예리고 남쪽 13.6km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위에 있는 여러 동굴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마포에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발견했다. 아마포에 싸인 뭉치들은 최초로 발견된 사해문서로 완벽한 이사야 사본, 공동체 규칙서, 하바꾹 주해, 전쟁규칙서, 찬양시편, 창세기 외경이었다. 그 후 1956년까지 고고학자들과 베두인들에 의해 11게 동굴에서 다양한 문서들이 발견되었고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쿰란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제1동굴 근처에 있는 제2동굴에서는 33개의 사본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제3동굴에서는 14개의 사본들과 청동사본을 발견했다. 제4동굴에서는 총 566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성서사본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제5동굴부터 제10동굴에서는 비교적 적은 수의 사본 조각들만 있었다. 마지막 제11동굴에서는 새 예루살렘, 욥기 탈굼, 성전문서 등을 비롯한 23개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들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제1동굴에서 제11동굴까지 이름을 붙이고 영어로 표시할 때는 동굴번호와 쿰란을 뜻하는 'Q'를 붙여 1Q에서 11Q까지 표시한다. 그리고 각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동굴명칭에 이름이나 숫자를 붙여 표시한다.
2) 사해문서의 종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850여 개에 이르며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씌어졌다. 가장 오래된 것은 BC 3-2세기 초의 것이고 가장 나중의 것은 AD 1세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사해문서는 대부분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고 소수의 그리스어 문서도 있다.
사해 문서 중 비교적 잘 보존된 두루마리 사본은 9개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전체 이사야서 사본, 또 다른 이사야 사본으로 본문의 일부만 보존된 것, 창세기 외경, 하바꾹 주석, 공동체 규율, 전쟁 규율, 감사 찬양집, 11동굴의 시편의 일부, 성전문서 등이고 대부분은 사본의 조각들이다.
이들 사본 중에서 에스델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서의 사본 200여개가 발견되었다. 이 사본들은 레닌그라드 사본이나 알렙포 사본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며 구약성서 정경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으로 마소라 본문, 70인 역 본문, 사마리아 오경 본문과 함께 구약성서 본문 형성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사해문서 발견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구약성서 외경의 히브리어, 아람어 원본들이 쿰란에서 발견되었는데, 희년서,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레위의 유언, 납달리의 유언, 유다의 유언, 레위의 유언, 요셉의 유언, 야곱의 유언, 크핫의 유언, 아브람의 환시, 창세기 외경, 예레미야서 외경, 다니엘서 외경, 에제키엘서 외경, 모세 외경, 여호수아의 시편, 나보니두스의 기도, 거인들의 책, 노아의 탄생 등이 있다.
전체 사해문서의 약 3분의 일은 공동체의 조직, 생활, 사상을 반영하는 사본들로 공동체에 의해 직접 저작된 문헌들은 공동체에서 소중히 여겨지고 필사되었던 문헌들과 용어, 문학양식, 문체, 종교적 사상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이 문헌들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씌어졌고 공동체의 자기이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규칙서로 볼 수 있는 문서는 다마스커스 문서, 공동체 규칙서, 전쟁 규칙서, 성전 두루마리, 정의의 교사가 요나단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또 전례와 관계되는 사본들과 지혜 문학적 작품들, 묵시 문학적 작품에 속하는 사본인 찬양시편, 안식일 희생 제사의 노래, 메시아 묵시록, 새 예루살렘과 기타문헌들이 있다.
2. 쿰란 공동체
사해문서를 남긴 사람들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다양하지만 이 사본들이 ‘키르벳 쿰란’에 거주했던 쿰란 공동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대체적으로 인정하며 이들을 에세네파나 최소한 에세네파의 한 그룹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다.
1) 쿰란 공동체의 기원과 역사
쿰란 공동체는 BC 2세기 중반부터 AD 1세기경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는 제2성전시대 후반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이 거세게 미치던 때였다. BC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등을 정복한 후에 희랍 사람들의 거주지가 군사적 목적으로 이 지역에 세워졌고 그들의 문화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지역의 토착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의 계승자들은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였고 이집트는 프톨레매오가, 시리아는 셀레우코스가 지배하였다. 팔레스티나는 프톨레매오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BC 210년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쿠스 3세의 침공으로 정벌되면서 셀레우코스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다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전통적 관습과 종교를 허용하였지만, BC 175년 안티오쿠스 4세가 셀레우코스의 임금이 되면서 유다인들에게 최대의 위기가 왔다.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직을 당시 대사제인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에게 뇌물을 받고 넘겨주었고, 야손은 더 강력하게 헬레니즘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다인들의 생활양식을 헬라식으로 바꾸려고 했다. BC 172년에는 성전 경리 책임자였던 메넬라오스가 야손보다 더 뇌물을 써서 대사제직을 가로챘고, 성전의 기물을 팔아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하였다. 메넬라오스의 성전기물 약탈사건과 헬라주의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첫 집단이 ‘하시딤’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항쟁을 준비하였다.
안티오쿠스의 박해는 BC 167-16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그리스식 우상숭배와 신전 창녀제도가 도입되었고 팔레스티나 전역에는 안식일 예배와 유다인 축제가 금지되었다. 부정한 짐승들을 제사하는 산당이 곳곳에 세워졌고 할례도 금지되었다.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에 반대하여 하스모니아(마카베오) 가문이 등장하고, 이들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수천 명의 반 헬라적인 유다인들과 합세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고 BC 166-165년에 유다 땅 전체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BC 164년에 성전을 정화하고 유다교 전통 예식을 재개하였다. 유다가 전투에서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요나단이 지도자이면서 대사제가 되었다.(BC 152) 그 후 마카베오 가문에서 유다의 지도자와 대사제직을 수행하였다.
요나단이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으로 본다. 요세푸스는 대사제 명단에서 BC 159-152년 사이의 대사제를 언급하지 않는데 이 시기의 대사제가 바로 정의의 스승이며, 쿰란 문서에서는 요나단을 정의의 스승의 반대자인 악한 사제로 부른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다.
다마스쿠스 문헌과 같은 쿰란 문헌에 따르며 이들의 역사는 BC 2세기부터 시작되며 BC 1세기 초에 발전하였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는 헤로데 임금 시절 파르티아 군대의 공격과 BC 31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되고, 그 뒤 재건되지만 로마와의 전쟁(AD 68년)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2) 쿰란 공동체의 고고학적 발견
사해의 북서 연안에 있는 키르벳 쿰란에서는 BC 8세기에서 AD 2세기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BC 8세기에서 BC 6세기에는 작은 거주지였던 쿰란에 BC 150년경부터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구조물들이 건축되었다. 대규모의 모임장소와 식당, 토기 작업장, 사본의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물 저장소, 수로 등이 만들어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쿰란의 구조는 여러 사람들의 공동생활에 매우 적합하게 되어 있었다. 쿰란에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우물이 발굴되었고 동쪽으로 공동묘지가 있는데 1,100기의 무덤이 있고 대부분이 남자의 것이며 머리는 모두 남쪽을 향해 있었다. 그 부근에서는 어린이와 여자의 유해도 약간 발견되었다.
쿰란 공동체는 BC 31년경 큰 화재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다시 AD 68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고 그 후에는 로마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다고 본다.
3) 쿰란 공동체의 종교사상
쿰란 공동체는 유대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에 철저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오경을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였고 오경을 철저히 해석하고 적용,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오경이 당시의 상황에 맞게 해석되어야 하며, 해석된 내용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정의의 스승의 해석은 특별한 권위를 가졌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는 특히 정결례에 대한 공동체의 특별한 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쿰란 공동체가 당시 다른 유대교 종파들과 구분되는 사상 중에 하나가 예정론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에 의해 미리 예정되었고 그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절대 예정론은 인간과 역사, 우주의 모든 질서에 적용된다. 인간의 미래는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며 의인인지 악인인지, 선택받은 자인지, 저주받은 자인지도 이미 결정되었다. 이러한 예정론적 사고는 쿰란 공동체가 관상학, 수상술, 점성술에 관심 갖게 하였다. 예정론에 의한 역사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사고는 달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했다. 그들은 달력을 통해 구약성서에 제시된 유다교의 종교 절기들을 올바로 지키고자 했다.
쿰란 공동체의 예정론은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문제의 해결을 윤리적 이원론으로 해결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악의 기원을 하느님에게서 찾는다. 태초에 하느님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을 창조하셨고 창조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이 두 영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은 이 두 영역 중 어느 한쪽에 속해 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들과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선과 악이라는 두개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은 창조 이래로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데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의 시대를 악한 영이 지배하는 때로 보고 따라서 의인인 자신들이 박해를 받고 시련을 겪는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선한 영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악한 영은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공동체는 예정된 하느님의 심판이 우주적인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 전쟁은 40년 동안 계속되며, 한편은 천사들과 쿰란 공동체 등이 빛의 자녀들이고, 다른 한편은 사탄과 악마들, 이방인들, 계약의 반역자들인 어둠의 자녀들이 있다. 이 전쟁을 통해 악한 영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이 나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하며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 특히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쿰란 문서에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의 사상에는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의로운 자는 보상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철저히 적용되고 있고, 선과 악이 투쟁하는 이원론적 시대는 하느님의 최후 심판과 함께 끝이 난다. 그리고 공동체가 기대했던 이상적인 미래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쿰란 공동체는 마지막 전쟁이 있기 전에 예언자가 먼저 나타나고 후에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사해 문서에 따르며 쿰란 공동체는 두 명의 메시아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아론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들의 임무는 각기 다른데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다윗 계열에서 나오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종말 전쟁에 참여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고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아론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보다 서열이 더 높으며, 대사제직을 수행한다. 이 두 메시아는 전쟁이 끝난 뒤 메시아 만찬을 함께 주재하며 여기에 새 계약의 공동체가 참여한다.
4)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변천과정을 보면 사제에서 평신도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쿰란 공동체가 처음 형성될 때는 사독계 사제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일반인 추종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들은 실질적인 지도자에서 경신례만 책임 맡는 자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공동체 규칙서 를 보면 사독계 사제들은 쿰란 공동체의 의식 가운데 메시아의 도래를 기원하는 모임인 ‘마지막 날’이라는 공동체 전체 모임을 명목상 진행하였지만 이들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었다.
바로 이때 사독계 사제들 대신 지도자의 역할을 할 ‘정의의 스승’이 나타났다. 정의의 스승에 대한 내용은 사독계열 단편문서들에서 언급되는데, 메시아 탄생 전에 올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바로 정의의 스승이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토라를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혼란의 시대를 잘 견뎌내고 메시아 시대가 무사히 도래 하도록 이끈다. 쿰란 공동체에는 유다인 법이 씌어진 ‘계시된 토라’와 씌어지지 않은 ‘감추어진 토라’를 구분하는데 정의의 스승은 ‘감추어진 토라’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토라만큼 중요하였다.
정의의 스승이 죽은 뒤 쿰란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를 대신할 여러 지도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심문관, 감독관으로 불려지는 ‘메바케르’, 임명받은 자라는 의미의 ‘파키드’, 이해시키는 자라는 뜻의 ‘마스킬’ 이 있었다.
5) 공동체 생활
쿰란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지원자가 경험해야 하는 과정은 공동체 규칙서에 서술되어 있다. 지원자는 2-3년간의 예비기간을 통해 공동체의 중요한 교리와 올바른 행동을 교육받고 오순절에 거행되는 공동체의 계약갱신 의식안에서 입문적 침수예식을 통해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공동식사를 포함한 모든 의식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침수예식은 침수자의 내적 상태를 강조한다. 즉 침수자의 회개와 영혼의 올바르고 겸손한 상태가 침수예식을 효과적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다른 거룩한 의식들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외적 정결을 제공하였다.
공동체는 15명으로 구성된 대표자들이 다스렸고 이들은 공동체의 모든 남자로 구성된 전체 모임의 결정을 따랐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나이와 그들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나뉘었다. 그들의 일과는 공동식사, 공동기도 그리고 공동성서 연구였다. 그리고 개인의 언행을 규제하는 구체적이고 엄격한 법규들이 있었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추방당하였다. 공동체의 가입자는 자신의 전 재산을 공동체에 귀속시키고 공동체의 의회에서 관리했다.
쿰란 공동체는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부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일정 기간 부정하다고 생각했고 부정을 씻는 기간이 지날 때까지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매일 매일의 삶 자체를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로 인식했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금욕생활을 더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6) 예배
쿰란 공동체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기도이다. 기도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물질적 제물을 대신할 하느님이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로 생각했고 하루에 두 번, 해가 뜰 때와 질 때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약성서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제사는 거부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통성 없는 대사제로 인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더럽혀졌고, 그로 인해 성전의 제사도 무효하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식사가 성전에서의 제의적 식사를 대신하며 그들의 거룩한 공동체 삶이 예루살렘 예배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는 다가오는 메시아시대로 연기되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예배가 전통적인 태양력을 버리고 이방인의 달력을 따르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들 공동체의 예배는 정확한 방법으로 정확한 시간에 드리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쿰란 공동체에서 지켜지는 절기날짜와 예루살렘 성전의 절기날짜가 서로 틀렸다.
3. 쿰란 공동체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관계
쿰란 공동체가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존재했고 이들 모두가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쿰란 공동체와 신약성서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몇 가지 실례를 살펴볼 수 있겠다.
1) 쿰란 공동체와 세례자 요한
신약성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설교를 하면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로 등장한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쿰란 공동체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들이 있는데 우선 광야에서 활동했다는 것과 이 둘 모두 이사야 40장 3절인 한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에서 그들의 활동 근거를 찾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설명할 때 이사야 40,3절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쿰란 공동체도 이사야서에 나오는 광야나 사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광야로 나가 생활했다. 또 그들은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을 토라를 공부하고 연구하가는 것을 해석하여 성서 연구에 열중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베풀었고 쿰란 공동체도 죄를 씻는 의미로 물로 씻는 정결 예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하는 사람의 일생에 한번 있었으리라 추측하는 한편 쿰란 공동체의 정결의식은 매일 행해졌다.
2) 메시아 사상
쿰란 공동체는 두 명의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다윗계열에서 나오는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아론 계열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메시아인 아론의 메시아였다.
신약의 공동체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아가 오기 전에 선구자인 예언자가 온다고 믿었고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인 예수의 선구자로 보았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처럼 정치적, 종교적인 메시아가 각각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메시아 즉 예수에게서 정치적 메시아와 종교적 메시아의 임무가 성취된다고 보았다.
3) 공동소유 제도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대 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사도 2,44) 이러한 공동소유 제도는 강제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고 헌금이나 봉헌물도 강압적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았고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쿰란 공동체도 공동 소유제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초대교회와 쿰란 공동체의 재산의 나눔과 소유의 방식은 매우 유사했다.
4) 공동식사
금식과 음식 절제는 유대교에서 중요한 신앙생활의 하나였고 세례자 요한도 음식에 대해 매우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예수께서도 금식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식탁에서의 친교와 음식의 나눔은 매우 중요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인들이 금식하는 동안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특별히 예수는 가난한 자, 소경, 절름발이, 세리 등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식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던 반면, 쿰란 공동체의 식탁은 매우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식사규칙이 있어서 정회원들만 참여하는 공동식사였고 서열 순서에 따라 앉아 식사했다.
이처럼 사해문서와 신약성서의 관계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두 문헌의 역사적, 문학적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왔고 두 문헌의 생성 배경인 쿰란 공동체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관계에도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이 두 공동체 사이의 다양한 유사점뿐만 아니라 분명한 차이점들도 강조되었다. 특히 신약성서의 인물들, 세례자 요한, 예수, 야고보 등이 쿰란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에 대한 가설들이 제기되었지만 이 인물들이 쿰란 공동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쿰란 문서의 발견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교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가 유대교의 배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태동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 사상인 새로운 계약 공동체, 예정론과 이원론, 성전 비판과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이해, 제사를 대신하는 기도와 공동식사, 메시아사상과 종말론 등은 고대 유대교 뿐 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교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쿰란 문서와 신약성서와의 관계, 쿰란 공동체와 초대 교회의 관계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해 문서, 쿰란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자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에서 연구되고 발표된 논문과 서적들이 있으며 가톨릭에서 연구된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쿰란 공동체의 종교적인 열정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의 철저히 이원론적이고 선민적인 폐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의 정신과는 멀어보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하느님의 선택(은총)을 받은’ ‘빛의 자녀’ 또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로서 인식하고 그 소명대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공동체 생활과 조직 생활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2,000년이 지난 이 시대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수도자로서 살아가는데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참고문헌>
천사무엘, <사해사본과 쿰란 공동체>. 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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