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정리
<쉽게 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
제 1장 우리는 무엇을 알고, 또 어떻게 그것을 아는 것일까? (인식론)
인간적 동물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주변 환경에 연결되며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을 구분하고, 정신(지성)으로 개별적 사물의 영상을 보편적 관념들로 변형시킨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보편적 관념들을 문장을 결합한다. 관찰되는 결과들을 그 원인들에 연결시키는 일은 인간 지성의 자연적 기능이며 정신은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 또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정신이 형성하는 두 가지 종류의 관념들이 있다. 첫째는 수학에서 사용되는 양적 관념이다. 그것은 물질적 대상의 영상으로부터 개별화시키는 모든 물질적 조건들을 벗겨내고 오직 양만 남겨 놓는다. 둘째는 이러한 양적 관념마저 벗겨 버리면 존재자가 남는다. 그것은 이제 존재하는 어떤 것의 관념으로 실재 또는 실재적인 것의 관념이다. 실재 관념이 없었더라면 실재적인 것과 비 실재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토미스트적 철학을 실재주의라고 한다. 실재주의는 인식 주체인 인간 인격과 그가 인식하는 실재적 세계 사이를 명쾌하고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모든 인간 인식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감각적 경험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며, 인간정신은 그것이 인식하는 실재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발견한다.
제 2장 우리의 존재 관념에 관한 성찰 (형이상학)
우리의 존재자 관념은 우리의 모든 보편적 관념들 너머에 있다. 그것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관념, 실존의 관념이고 실재의 관념이다.
BC 515년 파르메니데스는 감각과 정신으로 사물을 인식 할 때 모든 것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한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거나 생성 중에 있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자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이 감각과 지성을 갖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든 것은 생성 중에 있으며 존재자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이 우리를 주변 세계와 연결시켜주고 지성은 그것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는 감각과 지성의 증거들을 받아들이면서, 존재와 생성 사이에 중간지대인 가능태로 있는 존재에 대해 말한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현실이론을 물질적 우주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변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킨다. 실존하는 것은 모두 가능태이거나 순수현실이거나 가능-현실의 혼합이며, 가능 관념과 현실 관념을 합치게 되면 모든 실존하는 존재자들을 포용한다. 존재자들의 원인 사이의 연관관계를 볼 때 능동인은 그 활동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그 결과를 산출하는 작위자이며, 목적인은 어떤 작위자(능동인)이 어떤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유로 원인들중의 원인, 제일원인, 최종원이다.
감각적 경험을 가지게 되는 모든 물질적 존재자들은 모두 질료(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한편으로 서로 다르게 만드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이 형상이다. 그것들을 서로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질료, 가능성)이고,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형상(현실성)이다. 질료는 가능성으로 현실인 형상을 수용하고 질료는 형상을 제한하고 형상은 질료로 하여금 특정 종류의 물질적 존재자가 되게 한다. 이 중 능동인과 목적인은 외부적 원인이고, 질료인과 형상인은 내면적 원인이다.
또한 우리 정신은 실체와 우유를 분류한다. 실체는 모든 존재자들로부터 독립되어 자체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적 존재자이며, 우유는 그 자체적으로 실존할 수 없고 오직 어떤 실체 안에서만 실존하며 양, 질, 관계, 능동, 수동, 장소, 시간, 위치, 습성 등 9개의 종류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는 모든 실재적 존재자안에는 단일성이 있으며, 감각을 통해 형성한 관념이 정신바깥에 실존하는 실재적 존재자에 정확하게 상응할 때 참되다(진리)라고 한다. 모든 것이 바라는 것 즉 선은 모든 인과성의 궁극적 원인으로 선과 지성의 선인 미도 존재자 관념 속에 포함된다.
물리적 악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선의 결핍으로 존재자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존재의 부재이다. 그렇다고 無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물질적 우주 속에 실존하기 때문이다.
제3장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철학적 신론)
모든 사람이 신에 대해서 할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분의 실존에 대한 한 논증이 된다. 성 안셀무스는 우리가 신 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은 그것이 정신 내부의 것이 정신 바깥에 있는 것으로 부당한 비약을 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성토마스 이후로 여러 철학자들-데카르트, 라이프니치, 칸트, 뉴먼 등은 성 안셀무스의 편을 들고 있다.
성 토마스는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다섯 가지 길로 제시한다. 첫 번째 길은 우주 안에서 경험되는 운동 또는 변화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옮겨지는 것들은 그 자체 현실태로 있는 어떤 작위자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여진 것이며, 이런 동자들이 무한히 소급해가면 최초의 동자 즉 신에 이르게 된다.
두번째 길은 결과들을 산출하는 능동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논증도 역시 원인들과 결과들 사이의 무한 계열의 불가능성에 호소하여 최초의 원인 받지 않은 원인의 실존으로 결론짓고 있다.
세 번째 길은 우연적 존재자들이 실존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게 되면 이 우연적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어떤 필연적 존재자가 실존해야 한다. 만일 그런 필연적 존재자가 실존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더라면 그 어느 것도 지금 실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네 번째 길은 우연적 존재자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완전성의 등급은 필연적으로 어떤 필연적인 최고의 존재자 안에서 발견되는 최고의 완전성의 실존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제한도 없이 모든 완전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완전성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 길은 세계 속에서 지성을 결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특정 목표를 향해 활동하는 존재자들을 우리가 자주 본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자연적 존재자들을 그들의 목적으로 향하도록 만든 어떤 지성적 존재자가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모든 우연적 존재자들 안에서는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본질이다. 또한 신은 가능성과 현실성으로 합성되어 있지 않는 순수현실로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비 복합적이다. 신에게는 가능-현실, 본질-존재, 실체-우유 또는 그 밖의 어떠한 복합도 없다. 신은 무한히 단순하다. 이렇게 우리는 신이 무한한 존재자이고 온전히 선하며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우며 무한한 또는 무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 4장 신비스러운 물질적 우주 (우주론)
우리 지성은 감각적 영상들을 개별화시키는 물질적 조건들을 제거하여 보편적 관념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때로 상상력은 어떤 영상의 일부를 다른 영상의 일부와 결합시켜 실재 세계 속에 전혀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영상을 산출한다.
인류 역사 안에서 상상력은 거짓된 영상을 만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를 실재세계와 혼동하였다. 지구가 평평한 원반이 아니라 구형이라는 것과 지구중심인 우주가 아니라 태양중심적인 천체를 발견한 물리학의 발견을 볼 때 그것이 정확하다면 신학적 진리들에 모순될 수 없다.
한편 뉴턴은 물리적 세계가 불변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적으로 예견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그 후 아인슈타인은 절대적 운동이 없다는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운동, 공간, 그리고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뉴턴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뉴턴-아인슈타인적 우주관을 검토하는 것은 가공적인 우주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실존하는 우주를 철학하기 위해서이다.
이 물리적 우주를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는 질료 형상론으로 설명한다. 모든 실제적인 물질적 존재자들은 순수가능성인 제일질료와 어떤 제한된 현실인 실체적 형상이라는 두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질료가 실체적 형상을 받아들일 때 얻게 되는 물질적 합성체를 제이질료라고 부른다.
이 질료 형상론은 각각의 종들이 공간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개체를 포함하고 있는 다수성과 어떤 실체가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적 변화라는 두 가지 물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물리적 존재자의 두 원리인 제일질료와 실체적 형상은 그 자체로 존재자들은 아니다. 그들 각각은 다른 것이 없이는 불완전하고 실존할 수 없다. 그것들은 함께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하나의 물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물체적 존재자에게 개별화의 원리는 제일 질료가 아니라 양으로 표시된 질료이며, 이 양은 실체적 형상에 의한 하나의 우유이므로 그 실체적 형상에 뿌리박고 있다.
제 5장 인간 인격 (심리학)
성 토마스는 인격이야말로 모든 자연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며 이성적 본성을 지닌 자립적 존재자라고 말한다. 인격은 본성, 본질보다 더 완전하며,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적이며 이성은 물질적 인간 존재자의 실체적 형상인 인간 영혼의 한 능력(기관)이다. 인간 영혼은 유일하고 불완전하며 비물질적이고 단순하며 자립적이지만 이 중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인격에 적용될 수 있다.
인간 존재자 전체는 인간 인격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는 인간 영혼과 결합된 제일 질료를 포함하며, 인간 본질, 또는 인간 본성의 모든 활동은 인간 인격에 의해서 일어난다.
인간 의지는 최종적 목적인 행복으로 향하도록 되어있으며 인간의 자유는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들을 선택하는 데 성립된다. 하지만 지성이 의지에게 선이라고 인정하고 추천하는 것이 때로는 선의 외양이거나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실제로 악일 수가 있다. 이런 판단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인간 인격이고 또 그 판단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이다. 성 토마스와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지만, 인간 존재자는 동물 이상의 존재자이며 인간은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인간 인격은 자연 가운데 가장 완전한 존재자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자연 가운데 유일한 존재자이기도 하다.
제 6장 자연법과 인간적 행위 (윤리학)
인간 사회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인 개화이며 인간 공동체들의 위계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그 공동체의 개별 구성원들이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공동체도 원만하게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적 행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각 공동체는 어떤 권위 구조와 법, 그리고 처벌체계를 가진다. 일과 언어는 인간 공동체에 필수 조건이다.
성 토마스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자의 본성에 기초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토마스에게 인간은 창조주의 모상으로 지어진 존재자로 하나의 인격이자 지성을 지닌 자유로운 존재자이다. 그러나 인간 인격은 제한된 지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하나의 제한된 존재자이다.
진화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을 할 때 만일 진화가 정말로 발생했다 하더라도 오직 물체들만이 진화한 것이다. 영체들은 진화하지 않았고 진화할 수 없다. 인간이 낮은 형태의 동물로부터 진화했다 해도 인간의 영혼이 물질적 부분들로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하고 영적인 존재자이므로 진화가 불가능하다. 오직 물체들만이 진화하며 영적인 영혼은 진화할 수 없다.
인간 인격을 사회적 동물로 정의하는 것은 공동체의 다른 인간 인격들과 수평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며 인간 인격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하나의 존재자로 정의하는 것은 그를 창조적 존재에게 수직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는 하느님 자신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 직관에 있다. 이승에서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저승에서는 그분과 결합되는 데에서 충만을 발견한다. 하느님은 무로부터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것들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법 제정자이다. 하느님의 영원법에서 자연적 이성으로 발견되는 부분을 자연법이라고 부른다.
성 토마스는 진리로서의 존재자를 대상으로 삼는 사변적 지성과 선으로서의 존재자를 대상으로 삼는 실천적 지성을 구분하고 실천적 지성이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자연법의 기본 계율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고 가르친다. 인간 인격은 자연법의 제일원리 속에서 도덕적 결정들을 내린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요구되는 기준은 의무론과 결과주의이다.
성 토마스는 의무론자로 인간 인격이 창조주가 각인시켜 놓은 자연법을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적 행위들은 저 자연법을 기준으로 도덕적인지 아니면 비도덕적인지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가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적 행위의 도덕적 내용은 행위자의 지향에 있으며, 만일 그 지향이 해로운 결과를 나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결과들은 그의 죄의 경중에 영향을 미친다.
자연법은 인간적 행위가 자연적인지, 비자연적인지,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오늘날 자연법의 실존을 부인하면서 인간적 행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비자연적 그리고 비정상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성 토마스는 플라톤적-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적 덕과 거기에 초자연적인 덕을 수용한다. 초자연적 덕은 반복적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인간 인격에 부여된 자유로운 선물이며 비록 반복적인 행위로 취득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적 행위를 통해서 활성화되고 강화된다. 이 초자연적 덕의 기능은 인간 인격을 초자연적 은총에 의해 하느님 아버지께 결합시키는 일이다.
제 7장 성 토마스 이후 : 실재주의 대 관념주의
실재세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재주의와 관념주의라는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수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를 따라 많은 철학자들은 보편적 관념들이 실재 세계 속에 있는 물질적 대상들에 상응하고 우리의 정신이 물질적 대상들로부터 관념들을 추상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토미스트적 실재주의를 포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보편 관념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 감각이 물질적 우주를 접촉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하였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지식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로크, 흄, 칸트는 관념주의적 세계 속에 살았다. 관념적 세계 속에서는 인간 정신이 유한한 대상들을 창조하고 따라서 그것을 어떤 원인의 결과들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실존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어떤 합리적 증명, 합리적 기초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 후 500여 년 동안 관심에서 멀어진 아리스토텔레스적-토미스트적 실재주의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20세기에 일어났고 관념주의로 인해 인간 이성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하였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최근 실재주의의 복귀를 요청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현대의 내재주의와 주관주의가 유럽을 비그리스도교화 시켰다고 비판했다.
<쉽게 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을 읽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성의 작업들,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까지 펼쳐질 수 있는지 저자 로버트 오도넬은 성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솔직히 ‘쉽다’라는 단어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이란 단어는 잘 조화되기 어렵지만 저자는 이 책의 제목( HOOKED on PHILOSOPHY : Thomas Aquinas Made Easy )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로 인도하여 그 ‘철학에 깊이 빠지도록’ 초대하려는 의도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성 토마스의 철학을 떠난 현대의 사상과 철학들이 얼마나 인간 정신을 폐쇄적으로 만들었는지 바라보게 하면서 토미스트적 철학의 부흥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와의 시간적 차이는 1600년이고 성 토마스와 지금 시대는 800년 이라는 시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런 시간의 격차를 뛰어넘어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려는 인간 이성의 작용들을 통해 참 진리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 역시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성 토마스의 신앙과 삶보다는 그의 사상, 철학들이 중점적으로 펼쳐져 있으므로 신학적 내용보다는 철학적이고 이성적 사고들이 전개되고 있다. 저자는 방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핵심적이면서 간단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의 주제별로 배치하고, 본문 가운데 자세한 예문들을 통해 간단한 요약에서 오는 불명료함을 해소하였다. 또한 각 주제는 토마스 철학이 그의 정신적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토마스 철학으로 발전되고 정리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1장에서 인간의 정신과 상상력이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는데 기여하는지 인식론에 대해 말하면서, 점차로 존재에 관한 성찰로 형이상학(2장)과 더 나아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신론(3장)에 이른다. 그리고 4장에서 우주론을 통해 물리적 우주에 대한 인식에 이르며,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심리학(5장)과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또 인간들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의 성찰을 윤리학(6장)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7장에서는 데카르트 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방향과 다른 길로 나아가는 근대, 현대 철학에 대한 비판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찾아보기와 참고문헌, 각주해설을 통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많은 개념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도 함께 해주고 있다.
또한 사상뿐만 아니라 이 책의 주요 주인공들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전기를 짧게 요약해줌으로써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독자를 위한 배려도 느끼게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에 대해서는 서가에 꽂혀있는 몇 권의 책을 떠들어봤을 뿐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살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성 토마스의 수많은 저서와 사상을 한눈에 살펴본 느낌이고, 그의 철학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성 토마스에게 ‘이성만을 이용해서 구성하게 된 자연적 학문’인 철학과 ‘신의 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 초자연적 학문’인 신학은 결코 혼동되지 않으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참 진리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바로 ‘천사’적 ‘박사’ 라는 호칭이 이런 성 토마스의 신앙과 이성의 조화로움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적 한계에 도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일은 오직 인내롭고 머뭇거리는 발걸음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성인이면서 참 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삶은 의미를 상실한 현대의 우리에게 다시금 참 진리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도록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