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가 아닌 소금이 되십시오-Rev.류시찬
예전에 일산에 잠시 있을 때 이데레사수녀님이 기도때 사용한 유시찬 신부님의 글이다.
가끔 삶안에서 이 글이 생각날때가 있었는데
공동기도용으로 수녀님께 부탁을 하니
선뜻 보내주셨다.
좋은 나눔에 감사드리며...
참깨가 아닌 소금이 되십시오
류시찬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3-16)
여러분은 참깨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고추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파도 마늘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소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더러 소금이라고,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절묘한 상징어를 찾아내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수도자들은, 우리 성직자들은, 소금이라기보다는 참깨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소한 맛을 내며 음식들을 좀 더 맛 갈지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반찬 위에 낼름 올라앉아 한껏 멋을 내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반찬들의 맛을 내주기는 하되 그들과 섞여 하나가 되길 거부한다. 참깨로서 의연히 내 모습을 견지하려고 한다.
성직자로서, 수도자로서, 평신도까지도 가톨릭 신자로서, 세상과 일정한 선을 긋고 있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면서. 수도자들이 스스로의 벽을 치는 것은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성소를 지키고 수도회를 지키기 위해.
근데 예수님은 참깨가 아닌 소금이 되는 게 더 멋있다고, 당신 닮은 모습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은 반찬속에 철저히 녹아 들어가 버린다. 자신의 형체도 색깔도 다 없어져 버린다. 배추랑 하나 되어 버리고 고깃국이랑 하나 되어 버리고 갈치조림과 하나 되어 버린다.
음식들의 맛을 내어 주되 자신의 모습을 꼿꼿이 지켜내고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도직이, 미션이 행해지는 모습 또한 이래야 하리라. 세상 속으로 철저히 녹아 들어가 버리는 것. 하여,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신자로서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는 것. 세상과 완전히 하나 되어 동화되어 버리는 것. 드러나는 건 오직 반찬뿐인 것처럼 세상만 드러나는 것.
이런 점에서 수도회들이 저자거리 한복판에 있는 것은 아름답다. 수도원 안에 사람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는 것은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고 수도원의 생명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수도원의 담장을 높게 둘러쳐 놓고 일반인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선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거룩한 기도의 향만 끊임없이 살라 올리는 것은 이젠 이 세상에선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우리 역사상 그런 모습들이 있었노라고, 역사박물관의 한 코너에 모형으로 만들어 두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할 것 같다.
수도원 안으로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떠들어대는 통에 우리의 기도생활이 침해받을지 모르고 공동체의 삶이 흐트러질지 모른다. 허나, 그것을 염려해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한 두 달은 조용한 가운데 수도원 안에서 아름답게 방해받지 않으며 기도가 진행되고 공동체 생활의 안정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두 달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기도 안으로 세상 모든 일들이 분심으로 몰려들 것이며 공동체 안에선 지리멸렬한 문제로 서로 촉각을 곤두세우며 소모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하여 마침내 수도회 전체의 생명이 잦아들고 말 것이다.
외부인들의 출입이 있음으로 해서 시끄럽고 산만해서 우리의 기도와 공동체의 삶이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면, 적어도 그네들의 그 소란에 의해 수도생활이 망가지지 않도록 깨어 있게 될 것이다. 그 외부의 적(?)이 신선한 자극이 되어 끊임없이 깨어 있는 가운데 식별하게 될 것이고 애쓰게 될 것이고, 그것이 수도회와 수도자들의 생명력을 놀라울 정도로 키워내게 될 것이다.
수도자들이, 성직자들이, 신자들이 세상과 구분되지도 구분하지도 않는 가운데 세상과 세상 사람들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고 해서 그네들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처럼 짠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철저히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되 그네들에게 빠져있는 2%를 보충해 줘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삶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영성적으로 읽어내어 들려줘야 한다. 하느님이 빠져 있는 그곳에 하느님을 읽어줌으로써 자신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줘야 한다.
소금은 그렇게 음식 속으로 들어가 음식 본래의 완전한 아름다운 맛을 살려내게끔 해 준다. 이처럼 소금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소금이 주인공은 아니다. 음식 재료들이 주인공들이다. 다만 그 주인공들도 소금이 없으면 제 빛깔을 낼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소금이 중요하고 좋다고 해서 소금으로 배를 채우고 음식을 조금 먹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삶의 모습도 영성적인 측면이 대부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인간으로서의 보통의 일상적 삶이 주축을 이루어야 한다. 다만 그 삶은 어느 하나 예외없이 영성적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 삶 속에서 영적 활동 내지 영적 성찰이 삶 전체를 확연히 살려내듯 이 세상에 수도자나 성직자도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겠다. 그저 소금 양만큼만 있으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