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민케인
<시민케인>1941, 미국
<시민 케인>
1994년
1. 시민 케인
2. 오손 웰즈 Orson Welles
1> 시민 케인
사실 영화론 시간에 본 여러 영화 중에서 가장 거부감이나 긴장감 없이 볼 수 있었던 영화가 바로 <시민 케인> 이었다.
줄거리는 머릿속에 줄줄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오손 웰즈가 얘기하려는 주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톰슨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로즈버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번스틴이 말한 ‘잃어버린 그 무엇’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케인이 죽으면서 말한 로즈버드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죽으면서 떨어뜨린 유리공 속에는 눈오는 오두막집 풍경이 담겨있다.
난 그 유리공 속에서 로즈버드의 의미, 더 나아가서 오손 웰즈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또 내가 <시민 케인>에서 느낀 점을 말한다면, 풍족하진 않았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행복. 어렸을 적 썰매타고 놀았던 그 순수함. 행복을 잃은 후의 부와 권력 등은 결국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또 마구마구 앞만 보면서 달리다가 죽음을 앞둔 임종에서야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케인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눈썰매가 불속으로 들어가 타버리면서 연기가 되어 사라질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이거야! 오손 웰즈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 일꺼야!’
하지만 이 영화속의 그 누구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단지 낡아빠진 썰매일 뿐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난 지금 무엇을 향해 살고 있으며, 또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행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8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영화 첫 부분에 나오는 것이 제나두이고, 그 다음으로 뉴스 시사실, 엘 란초 나이트클럽, 댓처 기념도서관, 번스틴 사무실, 요양소, 엘 란초 나이트클럽, 마지막으로 다시 제나두로 영화scene 들은 전개된다. 이런 각 부분은 케인의 전 생애에 걸친 정보를 준다. 뉴스 시사실 부분은 케인의 모든 시기를 보게 해주며, 댓처의 일기는 소년기, 청년기, 그리고 중년기의 케인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주로 회상들은 연대기적으로 된다. 번스틴의 회상은 신문 편집인으로서 또 에밀리의 약혼자로서의 케인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한다. 릴랜드의 회고는 신혼에서 중년에 이르고, 케인의 두 번째 아내인 수잔은 노년기의 케인을 얘기해준다. 마지막으로 레이몬드가 얘기 해준 일화는 노년기의 케인을 말한다.
영화는 주인공 케인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저택의 담장 안으로 들어가 케인의 저택 제나두 안으로 간다. 방안에는 찰스 포스터 케인이 눈발이 날리는 작은 유리공울 움켜쥐고, ‘로즈버드’라고 중얼거린다. 케인은 그 공을 떨어뜨리며 죽는다. 그리고 그 유리공은 계단을 글러내려 깨지면서 클로즈업된다. 다음은 스크린에 비스듬히 영사된 ‘News on the March’ 로고와 함께 사운드 트랙이 들린다. 뉴스릴에서 케인 일생의 주요 사건들의 개관을 간결하고 긴밀하게 제공한다. 어떤 의미에서 뉴스릴은 <시민 케인>의 축소판이다. 영화처럼 뉴스릴은 케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뉴스릴을 통해 케인은 대단히 논쟁적인 인물이고, 수백만의 미국인에게 사랑과 미움을 받았으며, 그의 막대한 부는 상속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0세기로 전환될 무렵의 미국사 초창기에, 케인의 부와 그의 신문사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질녀와 결혼하고, 다시 두 번째는 가수인 수잔과 두 번째 결혼한다. 마지막으로 케인의 신문 제국이 대공황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이어서 그는 제나두에서 여러 해의 은둔생활 끝에 1941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뉴스릴이 끝나고 케인의 마지막 말을 파악하기 위해 뉴스릴의 상영이 연기되고, 기자인 톰슨은 ‘로즈버드’가 케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케인이 가까웠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파견된다.
세 번째는 엘 란초 나이트클럽 장면으로 톰슨이 수잔과의 인터뷰를 시도한다. 하지만 술에 취하고 적대적인 수잔은 톰슨과의 대화를 거절한다. 네 번째로 댓처 기념도서관을 찾아간 톰슨은 댓처의 일기를 읽으면서 댓처의 기억 속으로 접근해 간다. 케인 어머니의 여관 앞에서 한 소년이 썰매를 가지고 놀고 있고, 케인의 어머니는 댓처의 은행에 소년의 양육과 상속을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한다. 그 후 케인은 동부로 가서 성장하게 되고,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재산을 물려받는데 그는 재정적으로 몰락한 일간지인 ‘뉴욕 인콰이라’지에 관심을 보인다. 케인의 신문 기사는 댓처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되고 결국 중년의 케인은 대공황 도중에 방대하지만 파산한 신문체인을 댓처에게 양도하는 서류에 서명한다.
톰슨은 다음으로 한때 케인의 오른팔이자 매니저였고 지금은 케인 법인의 이사장인 번스틴을 방문한다. 번스틴의 내러티브는 인콰이러 사무실에서의 첫날을 회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케인이 번스틴과 릴랜드 앞에서 그의 첫 특종인 ‘원칙 선언’을 작성하고, 릴랜드는 그 기사를 보관할 것을 요구한다. ‘뉴욕 크로니클’의 최고 스탭진의 사진을 쳐다보다가 돌연 6년 후에 그 스탭들이 대거 ‘인콰이러’에 참여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한 다른 사진을 찍기 위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바뀌며, 요란한 향연이 열린다. 케인이 후에 유럽에서 돌아오는 날, 인콰이러 사무실에서는 스탭들이 케인에게 사랑의 컵을 선물하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의 질녀인 에밀리와의 약혼을 발표하고는 그곳을 나간다. 번스틴은 ‘로즈버드’란 어쩌면 그가 ‘잃어버린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여섯 번째로 톰슨은 어느 정도 노망끼가 있는 양로원의 늙은 릴랜드를 방문한다. 릴랜드의 회상은 연속되는 짧은 아침식사 대화를 통해 케인과 에밀리의 사이가 악화된다는 케인의 첫 번째 결혼이야기와 케인의 수잔과의 첫 만남과 정적인 짐 게티스에 의한 그의 정치적 파멸을 묘사한다. 케인이 선거에서 패한 후 릴랜드는 술에 취했고 그의 우상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시카고 사무실로 전근을 가게 된다. 릴랜드의 회상 마지막 부분은 케인이 수잔과의 결혼과 그가 그녀를 위해 지은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의 가수 데뷔를 언급하는데, 수잔의 공연에 대해 릴랜드는 악평을 하고 케인이 이것을 마무리하면서 그를 해고한다.
톰슨은 다시 한번 엘 란초 나이트클럽으로 수잔을 찾아간다. 수잔은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고, 케인과 결혼 직후에 그녀의 발성교사에게 수업을 받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발성교사는 수잔의 목소리가 너무 나빠서 수업을 계속하는 것을 거절하려는 순간 케인은 수잔과 교사에게 수업을 계속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수잔의 시카고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데뷔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그녀는 아리아를 시작하지만 공연은 아주 미미한 박수소리로 끝나고 케인 혼자서만 혼자서 크게 박수를 친다. 시카고 아파트에서 수잔은 릴랜드의 악평에 대해 케인을 비난한다. 케인은 릴랜드를 해고하고 그에게 2만 5천달러를 보냈으나 릴랜드는 수표와 함께 예전의 ‘원칙선언’을 그에게 돌려보낸다. 그리고 수잔은 그녀의 가수 경력을 고집하는 케인에 의해 강요된다. 결국 수잔은 자살을 시도하고 케인은 그녀가 더 이상 노래를 안 해도 좋다는 것을 약속한다. 제나두에서 케인은 냉소적인 가정의 폭군이 되었고 수잔은 포로나 다름없었다. 케인은 수잔에게 피크닉을 제안하지만 그곳에서 그 둘은 싸움을 하게 되고 결국 수잔은 케인에게서 영영 떠나게 된다. 수잔은 회상을 마치면서 제나두의 집사장인 레이몬드를 만날 것을 톰슨에게 조언한다.
화면은 제나두로 돌아가서 레이몬드의 회상이 시작된다. 수잔이 떠나자 분노한 케인은 미친 사람처럼 수잔의 방을 부수다가 유리공을 발견하자 부수기를 멈추고 눈이 날리는 유리공을 손에 쥐고 ‘로즈버드’라고 속삭이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레이몬드의 회상은 여기서 끝난다.
톰슨과 레이몬드가 중앙계단을 내려올 때 케인의 많은 기록들과 방대한 수집품을 정리하는 일꾼과 기자들이 보인다. 톰슨의 동료들은 그에게 ‘로즈버드’의 의미를 묻지만 그는 “어떤 단어가 한 사람의 일생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로즈버드란 그저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에서 한 조각처럼 잃어버린 한 조각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면서 별로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톰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고, 레이몬드의 지시에 따라 케인의 쓸모없는 유물들은 화덕 속에 던져진다. 그리고 영화 첫부분의 제나두 바깥모습이 보이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문 위에 장식한 ‘K’라는 케인의 머릿글자가 크게 보이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제나두의 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시민 케인>은 몰락과 파멸에 관한 영화이다. 주인공의 미스테리는 풀리지 않은 채 끝난다. 영화에서 우리는 일곱 개의 다른 관점을 보게 되는데 케인 자신이 알았던 것 보다 그의 일생의 상황을 아마 더 많이 알게 된다. 그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으며 죽었는지를 알았지만, 그러나 아마 그가 의미했던 것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케인의 길고 파란만장했던 일생동안 그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영화는 진행된다. 순간 나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얼마 안되지만 내 일생의 3분의 1을 살아왔다. 내 주위에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누구였고, 또 내가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어떤 모습과 어떤 인간으로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또 앞으로 남은 삶 동안에 내 주위에서 나와 가까이 하게 될 사람들과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게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내 삶의 목표, 그것은 행복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부나 권력-쪽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또 내 삶 또한 내 자신이 중심이 되겠지만 나의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 같다.
케인이 부와 권력을 얻으면서 잃어버린 사랑과 사람과의 인간적인 관계들.
어쩌면 내 자신도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2> 오손 웰즈
오손 웰즈는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연극을 시작하여,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의 연극계에서 젊은 배우이자 연출자로서의 자리를 다져갔으며, 형식에서는 실험적이고 내용에서는 진보적인 연극들을 무대에 올렸다.
웰즈가 1938년 연출한 라디오극 <우주전쟁>은 방송내용을 실제 상황으로 착각한 청취자들의 피난소동과 함께 하루 아침에 웰즈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940년 헐리우드의 메이저 회사였던 RKO는 불과 25세의 오손웰즈에게 <시민 케인> 제작의 전권을 부여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으로써 그때의 웰즈는 영화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1940년에 제작, 1941년에 완성된 웰즈의 데뷔작이면서 대표작인 <시민 케인>은 규모와 기술적 완성도에 있어서 당시로서는 헐리우드에서만 가능했던 대작인 동시에 헐리우드의 관습에 도전하는 대단한 기법과 주제를 담은 ‘반헐리우드적’ 작가영화의 변모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미국언론계의 대단한 거물인 윌리엄 허스트를 모델로 한 시나리오. 그러나 웰즈는 주인공 케인의 일생을 비연대기적 시제와 다양한 시점으로 구성했다. 비평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복합적인 드라마 구조는 하나의 혁신적이었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 이것은 흥행의 실패를 예고하는 기괴함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스타일적인 관점에서 웰즈는 기록영화적인 리얼리즘의 수법과 상징과 환상의 표현주의적인 기법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웰즈는 마치 영화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역사가와 영화의 새로운 미학을 실험하는 천재적 예술가의 양면을 동시에 지닌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을 비판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문왕 허스트는 제작사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시민 케인>은 완성되었고 흥행은 참담했다.
그러나 흥행 참담에도 불구하고 <시민 케인>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연출력과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그는 ‘천재 감독’이라 불리웠고, 끊임없는 스튜디오와의 갈등에도 계속 영화를 만들수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앰버슨가>(1942)로 <시민 케인>에서의 솜씨를 다시 한번 발휘하려던 웰즈의 시도는 흥행의 위험부담을 염려한 제작사에게 영화 최종 편집권을 빼앗김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웰즈는 <시민 케인>의 제작 당시와 같은 좋은 조건인 거의 무제한적인 스튜디오의 예산 지원, 헐리우드의 일류 스텝들과 자신과 손발이 맞는 헌신적인 배우들, 충분한 제작기간과 홍보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방인>(1946)과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8)은 스튜디오의 주문에 따라 웰즈가 고용감독인 위치에서 만들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후 웰즈는 다른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하여 돈을 벌고 작은 규모로, 혹은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예산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프로덕션에서 간섭없이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시민 케인>을 만든 감독보다는 <제3의 사나이>(1949), <백경>(1949), <길고 더운 여름>(1959)에서의 특색있는 조연배우로 기억하게 되었다.
웰즈의 타협을 모르는 성격과 영화에 대한 고집은 그를 헐리우드의 이단자로 만들었고, 유럽과 미국을 떠돌다가 1985년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수많은 미완의 프로젝트와 씨름하며 좌절과 실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시민 케인> 한 편만이라도 그가 위대한 영화작가의 이름에 값한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한 학기 동안 영화론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 같다.
한겨레 21을 구독해서 보고 있는데 지난 주에는 영화사 100년이라는 주제로 세계의 대표적인 명작 100편과 그중 베스트 10편을 선정한 것을 보았다. 영화론을 듣기 전이라면 베스트 10편중에서 내가 본 영화는 몇편이라도 될까? 하고 보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와 <모던 타임즈> 정도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론 시간을 통해 보게 되었고 알게 된 영화인 <전함 뽀쫌낀>, <자전거 도둑>, <시민 케인>, <게임의 규칙>과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오딧세이>이 베스트 10에 끼어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사실 지금까지 난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또 영화를 재미와 흥미로만 알았지 그것이 영화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고 지낸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한 학기) 동안에 많은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영화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94년 영화론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