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계태엽오렌지
<시계태엽오렌지>
1971년, 영국, 스탠리 큐브릭
A CLORKWORK ORANGE
1. <A Clorkwork Orange>의 작품 감상
2. 스탠리 큐브릭
1. <A Clockwork Orange>의 작품 감상
교수님께서 “이 중에 미성년자는 없지?”라는 말을 하실 때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영화의 첫 부분에 화면 가득 나온 알렉스의 얼굴, 눈을 살짝 위로 치켜뜨고 화면 밖의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표정. 난 갑자기 이 영화가 싫어졌다. 그리고 계속 좋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이 영화를 다 볼 때까지(결국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보지 못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제목의 ‘clockwork orange’에 대해서는 영화를 시작하면서 부터 조금은 감이 잡혔다. 교수님께서 영화를 보기 전에 대략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도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 알렉스가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오렌지 일거라는 생각, 또 이 괴팍한 오렌지가 점점 시계처럼 움직이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a clockwork orange>의 줄거리에 대해서 보려고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지금의 세계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지금의 세계와는 좀 다른, 미래라고 생각되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나쁜 짓만 일삼고 다니는 네 명의 악당이 있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그 중 주인공은 17세의 알렉스이다. 그는 네 명중에서 가장 악랄하고 괴팍하고 거친 악당이다. 이 네 명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주정뱅이 노인을 집단으로 구타하고, 걸핏하면 다른 패거리와 싸움박질을 하고, 늙은 작가와 젊은 부인이 사는 집을 습격하여 가정을 파괴시킨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저지르는 것이 예사이다. 알렉스 패거리는 아주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강간을 저지른다. 게다가 춤을 추며 노래까지 부른다. 저녁에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꺼리던 부인이 문고리를 따주자마자 네 명의 악당은 치고 들어와 늙은 남편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젊은 부인을 붙잡는다. 알렉스는 태연히 노래를 부르면서 남편을 구타하고 부인을 강간하게 된다. 이 때 노래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주제곡인 [Singing in the Raine]이 흐른다. 알렉스는 이 노래에 맞추어 부인을 곤봉으로 때리고 남편을 발길질로 구타한다. 동작만으로는 그가 춤을 추는 것인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들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이러한 악당들의 악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나머지 세 명의 친구들에게서 점점 신뢰를 잃어가고, 또 한집의 가정집을 습격할 때 그 집의 주부를 겁탈하려다가 그 여자를 살해하게 되고, 세 명의 친구들에게도 결국에는 배신을 당하게 되어 경찰에 잡히게된다.
체포된 알렉스는 소년원에 수감된다. 정부는 사회에서 패륜아적인 행동을 한 그를 인간개조의 실험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연구소 같은 곳으로 옮겨져 정신 수술과 강제작인 세뇌를 받게 된다. 갖가지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 알렉스에게 가해진다. 알렉스를 꼼짝 못하도록 묶어 논 뒤에 그의 두 눈에는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의 위아래로 장치를 해놓는다. 그리고 알렉스가 수감되기 전과 같이 저지르고 다녔던 온갖 폭력적인 장면들을 찍은 영화를 보여준다. 또 이때에도 아이러니 하게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이 이 폭력영화와 함께 틀어진다. 계속되는 이러한 고문에 알렉스는 그만하라고 애원하지만 마침내 이 인간개조 실험은 그의 공격성향을 파괴한다. 개조 수술이 끝나고 시험이 치러지는데, 어두운 무대에 혼자 남은 그에게 어느 것도 걸친 것이 없는 여자가 접근한다. 예전의 그 같으면 좋아서 어쩔줄 몰라 했을텐데 이제 그는 여자에게서 도망치려하고 있다. 이제 그는 예전의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완전히 성격 개조된 로봇과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이 시험으로 만족한 정부는 그를 사면해주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집도 예전의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다른 젊은이를 아들과 같이 생각하고 지내고 있었고, 그를 치려고 하는 알렉스는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수업시간에는 여기까지 보았다.) 길에 나선 알렉스는 이번에는 자기가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으로부터 복수를 당한다. 주정뱅이 노인들이 몰려와 그를 두들겨 패는데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또 경찰이 와서 말려주나 싶더니 그 경찰은 예전에 함께 몰려다니던 패거리이다. 이제 경찰이 된 친구들은 알렉스를 외딴곳으로 끌고 가 두들겨 팬다. 패인이 다된 그가 마지막으로 간곳은 예전에 친구들과 습격했던 노인이 살던 집이다. 그러나 그 집 부인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불구가 된 노인은 보디가드와 함께 살고 있는데, 거기서도 알렉스는 가혹한 복수를 당한다. 그를 다락방에 가두고 베토벤을 틀어대는데 결국 알렉스는 뛰어내려 큰 부상을 입고 온몸에 깁스를 한 채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알렉스가 사회에 돌아와 겪게 되는 일들과 알렉스에게 행해진 세뇌가 언론의 표적이 되어 비판적인 여론으로 곤란하게 된 정부는 병원으로 그를 찾아와 화해를 청한다. 또 각본대로인지 사진기자들이 몰려와 두 사람을 찍어댄다. 알렉스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 포즈를 잡아주지만, 곧 뭔가를 느꼈는지 얼굴이 일그러지게 되고 화면이 바뀌면서 알렉스가 어떤 여자와 섹스를 하는데 그 주위에서는 훌륭하게 치장한 신사와 부인들이 그를 구경하면서 박수를 친다.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인 [합창]이 울려퍼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알렉스가 소년원에 수감되기 전까지의 영화 전반부를 보면, 한마디로 역겹다.
우리가 현재 신문이나 T.V뉴스 등을 통해 듣게 되는 폭력사건, 성폭행사건, 납치 사건, 가정파괴범 뉴스 등을 알렉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았다. 우리는 흔히 이런 불미스런 뉴스 등을 듣게 되면 그 범죄자에 대해 아주 치명적인(?) 말을 하게 된다. ‘그런자들은 모두 잡아서 영영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 또는 더 심하게 말한다면, ‘그런 놈들은 사형시켜야 돼. 그래야지 다시는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지’ 등등...
나도 역시 그랬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부를 보면서 알렉스를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 알렉스가 루도비코 센터에서 교육, 세뇌, 고문 등을 받고 난 뒤의 행동 등을 보면서 혼란을 느꼈다. ‘도대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라고. 줄거리를 보자면 복잡한 얘기는 아니다. 깡패 같은 한 청소년이 나쁜 짓만 하고 다니다가 소년원에 수감되고 그의 악한 공격성향을 파괴하는 교육을 받고 나서 착한(?) 사람이 되어서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는 얘기이다. 어쩌면 이런 스토리는 다른 영화에서도 본 듯한 얘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영화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쳐 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알렉스처럼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범죄자들을 이 영화에서처럼 교육, 세뇌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개조시킨다면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또 개조를 시킨다면 어떤 방법으로 개조시킬 것일까. 이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인물로 개조시킨다면 ‘사회적’이라는 기준은 누가 세우는 것인가. 이 사회를 이루는 다수의 민중의 뜻에 맞추어서 아니면, 이 시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몇몇 소수의 지배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준이 정해지는 것일까 계속해서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떠오른다.
분명 알렉스가 저지르고 다녔던 행동들은 사회에서 보면 ‘죄악’이었다. 그렇지만 그 죄를 다스리려고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시킨다는 것 또한 자연을 거스리는 ‘죄악’이라고 생각된다. “모두 자네를 위한 것이네”이라는 말로 알렉스에게 행해진 일들이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세뇌를 받은 알렉스는 더 이상 악한 행동을 저지르지 못한다. 나쁜 짓을 하려면 육체에 경련이 일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부의 인간개조 프로그램에 의해서 말이다.
알렉스에게는 신부의 말처럼 더이상 선택권이 없다. 두려움만이 그를 자제하게 한다. <선과 악>사이의 선택권이 인간에게서 박탈되어 버린 것이다. 제목의 clockwork orange처럼 시계같이 움직이는 오렌지, 즉 로봇으로 개조된 인간 알렉스가 된 것이다.
이 영화의 테마는 <선택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감독은 알렉스가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를 행하지만, 영화전반을 통해 반사회적인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전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2. 스탠리 큐브릭
큐브릭은 사진잡지<룩>(Look)에서 사진기자를 하다가 1940년대에는 당시의 메이저 제작사였던 [R. K. O]에서 몇 편의 다큐멘타리를 만든다. 그러다 1955년 제작자 제임스 해리슨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헤리슨-큐브릭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극장용 첫 장편 <살인>을 연출하여 타임즈로부터 오손웰즈 이래로 가장 탁월한 영상미를 연출했다는 평가를 얻는다.
57년에는 <영과의 길>을 연출하여 주제의식면에서 “이제까지 만들어진 반전영화 중 가장 비타협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듣고, 기법상에서는 “큐브릭의 카메라는 거침이 없으며 마치 무기와도 같다.”라는 평가를 얻는다.
독립제작으로 영화를 시작한 만큼, 큐브릭의 작업스타일은 예술가의 창의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을 추구한 것이었다. 59년 역사 스펙타클인 <스팔타쿠스>로 솜씨를 보인 큐브릭은 코미디로 방향을 전환하여 <로리타>를 발표한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1968년과 1971년에 각각 발표한 <2001:우주의 오딧세이>와 더불어 기계문명에 지배되는 미래사회의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해부한 점에서 주제상의 연관성을 갖는 작품이자, 당시의 팽배해 있던 냉전적 사고를 꼬집은 사회비평 영화였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큐브릭 영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면 <2001년>은 감독 자신의 예술적 능력이 꽃을 피운 작품이자 3년 후 발표된 <클락웍 오렌지>와 더불어 큐브릭 영화의 최정점을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1957년에 이르면 큐브릭은 중세 사극 <베리 린든>을 발표하고, 1980년에는 스테픈 킹원작의 공포영화 <샤이닝>을 만들어 ‘역시 큐브릭’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1980년대에 와선 87년의 월남전 소재영화 <장탄적재>를 발표한다.
이상의 작품들은 40년에 가까운 연륜으로 따지면 그리 많지 않은 수이고, 게다가 그의 영화 모두가 ‘영화사상 전무무후한 걸작’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큐브릭을 봐야 하는 이유는, 천재는 ‘단 한편의 걸작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큐브릭은 <2001년>과 <클락웍 오렌지>, 단 두 편의 영화만으로도 우리들에게 지우기 힘든 여파를 남긴, 강렬한 영화적 체험의 원인 제공자가 될 것이다.
<1994년 영화론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