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

Sr.Julia 2008. 12. 10. 12:12

수련기때 쓴 창립자에 대한 묵상

 

바오로가족의 창립자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에 대해 짧게 숙고한 것들...(2002)

 

1. 가치화 (시간에 대한 가치화/ 하느님의 계획하에 수용되는 경험을 가치화)

가치화한다는 말을 충분히 깊이지는 못했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우선 시간에 대한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대단한 청빈과 책임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시간에 대한 청빈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게 생각해 왔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가치화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온 시간의 청빈보다 좀 더 깊이 있는 말씀으로 와 닿았다.

그동안 내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시간은 내게 주어졌고, 또 그 시간에 무엇 무엇을 더 할 수 있고, 그 흘러가는 시간을 아끼면 내게 어떤 유익한 면이 있고, 그 시간에 그것을 못하게 되면 다른 시간을 빼앗아야 되고... 하는 등 내게 있어서 시간은 틈 없이 써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어떤 면에서는 시간의 청빈을 확실히 살려고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가치화한다는 말은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좀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가치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을 가치화 한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해서이다. 내게 맡기신 시간을 하느님의 시각 안에서, 그분의 계획안에서, 가치롭게 받아쓰려는 마음의 태도이다. 내게 주신 시간, 그 순간이 그냥 흘러가지 않게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간의 주인은 바로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을 가치화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시간에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는 마음과 자세이다. 또한 내가 1시간을 기도해야 할 때 그 시간이 그냥 주어졌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1시간 동안 하느님께 드릴 찬미와 예배를 충분히 그 안에서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30분밖에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시간을 1시간의 기도처럼 내 안에서 더 큰 열의를 갖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향하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바치며, 그 30분의 기도시간을 그 시간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시간 안에 품었던 결심과 마음의 태도를 하루라는 삶 안에서 계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의식적 자세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경험의 가치화는 무엇인가? 나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그 경험이 나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려고 하는지 바라보는 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수도원에 오기 전에 있던 다양한 경험들, 배움들,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지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되새김질 해야 하는지 계속적으로 숙고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바라봄의 기준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뜻이며, 그 계획안에서 나의 경험들을 새롭게 가치화하고, 취해야 할 것과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을 바르게 식별하고, 또한 바르게 우선 순위를 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된다.

 

2. 영적인간과 예언자

신부님의 자료를 읽으면서 영적 인간과 예언자는 서로 다른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예언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속세, 세상과는 거리가 먼 교회안에서만 존재하는 한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적인간과 예언자 모두 자기 자신 또는 교회라는 틀을 넘어 ‘동시대 사람들’ & ‘당대의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영적 인간은 기도의 사람 + 구제성 + 활동의 사람이라고 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이어지고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과 이어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도구로 내어 놓는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실과는 상관없이 기도만 하는 사람, 교회라는 세상 안에서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또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또 세상의 배움과는 다른 하느님의 배움터 안에서 점차 깨닫게 된 것은 정말 하느님과 단단하게 연결된 영적인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그 끈이 단단히 연결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와 활동의 조화, 일치라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이 따로 있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하지 않지만 살다보면 간혹 기도와 삶이 분리가 되어 있는 것을 느낄 때, 진정한 복음 선포자였고, 또 위대한 예언자였던 사도 바오로와 알베리오네 신부님을 묵상하게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며 예배드리는 것과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활동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되새기게 된다.

3.

하느님의 주도권...

알베리오네 신부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을 보면서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면에서나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태리 뿐 만 아니라 세상 곳곳이 혼란스럽고, 그때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상의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시대였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읽고 숙고하면서 복음 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높은 곳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 사이로 자신의 갈 길을 가셨다고 했다. 알베리오네 신부님 시대를 상상하면서 알베리오네 신부님을 비롯하여 그 시대 많은 성인성녀들과 교회의 장상들과 그리고 선한 가톨릭신자들 또한 복음의 예수님처럼 혼돈시대의 그 가운데 길을 망설임 없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하심에 따라 갔으리라는 것을 떠올리며 정말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인간의 눈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묵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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