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2청원기중(2001)에 쓴 묵상글!
<이것을 묵상하라>
1.하느님의 뜻
“하고 싶은 것과 반대되는 것을 하자! 우리들이 우리 뜻과 반대되는 것을 하는 만큼 성인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 내 뜻 전체를 바칠 수 있다면...”
우리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만을 행한다...
이런 말이 생각이 난다. 인간이나 모든 생명체나 자신에게서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이면서도 그 이전에 자기라는 존재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즉, 자신과 같은, 자신을 닮은 후세를 남김으로써 그 안에 자신의 존재 또한 남기고 싶어하는 것, 자신이 없어짐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예전에는 이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아니 내 본성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형성되어 사시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내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내 안에서 자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바로 이것이고, 나 또한 이 소망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렇게 살기란 너무나 힘이 든다. 내가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만 그것을 따르는 것은 확실히 아는 것만큼 쉽지 않다. 그것은 나의 뜻이라고 말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법’ ‘내 본능’ 이 아직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룩한 무관심’ 이라는 말을 수도원에 와서 처음으로 들었다. 무관심은 무관심인데 ‘거룩하다?’ 지원기 때 내게 다가왔던 의미는 타인에게 갖는 거룩한 무관심이었다. 그런데 알베리오네 신부님 말씀안에서는 내 자신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생애가 길든지, 아니면 짧든지...진심으로 거룩한 무관심을 지니고 있는가?’ 내 자신, 내 존재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마음에 드는 것만을 원하고 내 본성에서 울려오는 소리만을 들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다시 책을 폈을 때 내 눈에 들어왔던 말씀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와 닿았다. 어제 내 자신과 내 존재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을 묵상하면서 그래 이렇게 살아야지 결심했지만 하루아침에 내 자신이 또다시 무너졌음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서원 사도직에 와서 그런지 긴장도 많이 되고 힘이 들었다. 아침부터 코피를 쏟았는데, 어제 수녀님께서 오늘 낮은 개인 시간을 갖고 오후에 서원에 나오라고 하셨다. 피곤했기 때문에 좀 쉴 수 있겠다 싶어 속으로 좋아했는데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다른 수녀님이 일이 있으시니 개인시간을 미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예’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래 어제가 그 날인데 어제도 바꾸시더니 오늘도 오후에나 개인시간을 갖게 되었다. 머리 속으로는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쉴 시간이 모자라는데, 리포트며, 볼 책도 있는데...쉬면서 그것을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이라는 계산이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 식사도 즐겁지 않고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성당에 와서 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주님을 바라보니...어제의 독서가 떠올랐다. ‘내 자신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 정말 이 순간에는 내 안에 내가 가득 차 있다고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나 그리고 그 안에 있을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내 본성에서 울려오는 소리만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느끼는 때가 오늘 하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종종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내 맘에 들지 않는 무엇인가는 해야 할 때, 내 몸이 아플 때...다른 무엇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내 안에 가득 찬 나를 본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의식하게 되었고 그전에는 그냥 그 상태에서 머물다가 다른 좋은 것이 생기면 풀어졌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항상 내 자신을 경계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순간적으로 들게 되는 나에 대한 나의 지배에 대해서...그리고 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느님께 의탁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인전을 읽다보면 하느님께서 성인들에게 내리시는 어떤 사명을 많이 보게 된다. 아빌라의 데레사성녀는 가르멜을 개혁하는 사명을, 프란치스코 성인은 쓰러져 가는 교회를 청빈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에 맞서 진리를 설교하는,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위한 그리고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매스컴을 통한 복음 선포 사명을 받으셨다.
이렇게 성인들의 삶을 보면 내 자신은 하느님의 뜻과는 아주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마치 어떤 현시나 계시, 드러나는 표지가 없는 것은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메리놀회 마신부님께서 오셨다. 식사 때 성인들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이제는 어떤 수도자나 성직자 성인이 아닌 평신도라고 말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성인이 나와야 한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의 역할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살았던 성인, 아버지로서, 자식으로서,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했던 평신도로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내가 있는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닌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 이 시간, 이 사람들안에서의 거룩함을 사는 것이 바로 오늘 내가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신 것이다. 가끔 서원에 오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을 때 자신들의 삶을 아주 하찮게 보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리고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거룩하게 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너무나 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가끔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닌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세속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요즘의 영적독서(하느님섭리에 맡겨드림)나 송봉모 신부님의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이재민 신부님의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등을 보더라도 내 삶의 자리와 무관한 하느님의 뜻은 없다.
이 말씀들에 아주 많이 공감한다. 종종 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서원 사도직을 할 때 내 마음을 언짢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일 수 있고, 또 어떤 행동을 보고 그럴 때가 있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터무니없이 느껴질 때 가끔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런 힘듦을 그냥 힘들다고 그것에 내가 떠밀려 다니다보면 아주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하다. 그런데 그 힘듦을 나와 좀 떨어져 놓고 볼 때, 특히 이 상황이 오늘 내게 이루어질 일이었고, 또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좀 더 진보하고 거룩해질 수 있다면...이라는 지향을 가질 때 그 힘듦이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을 느낀다. 이런 체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
2. 겸덕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첫째로 닦아야 할 덕은 겸손이다. 두번째, 세 번째 닦아야 할 덕도 겸손이다. 겸손은 복된 덕이다. 많은 영혼들이 진보하려고 하지만 기초가 되는 겸덕이 없으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겸손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부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겸덕의 삶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나는 도저히 살수 없는 것처럼 다가왔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첫째로 둘째로, 셋째로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덕이지만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죄인이며 무보다 못한 존재이며 멸시를 당해도 소외를 당함을 기뻐하고 비방을 받고 곤경에 처함을 기뻐하고 오히려 멸시를 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은 내게 힘겹게 다가왔다. 이런 생각에 쌓여 있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겸덕을 생각하기로 했다. 위대한 성인들이 살았던 겸덕이 아닌 정말 나약한 내가 조금씩 조금씩 실천할 수 있는 겸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도직을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겸덕...
그동안 자라면서 또 생활하면서 길들여진 것이겠지만 무슨 일이든 할 때 그것이 내게 주어진 것이든, 또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든 미리 머리로 계산을 하게 된다. 저것(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게 된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그리고 하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그리고 만약 내가 해서 힘만 들고 어떤 실질적인 이익-물질적이나 정신적인 만족, 명예, ..-이 없다면 그것을 포기하고 또는 내가 들인 힘과 노력에 비례하는 어떤 이익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라든 해내려고 했었다.
그것을 되돌아보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완벽한 것만을 갖추려고 하는, 또 실패의 요소를 없애고 내 자신이 완벽하고 싶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것이라고 미안한 것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내면 깊은 속마음은 나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때문에, 그리고 지금까지 가꾸어 왔던 완벽하다는 나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으려고, 나 혼자 해냈다는 우월감에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차라리 그만두지 뭐..라고 했던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실 이런 내 모습 또한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나이다...’ 입회를 하고 나서 이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빳빳이 긴장되었던 굳은 몸이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앉은 것처럼 편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감사했다. 완벽한 주님 당신이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셔 주심에 대해서...
하지만 이렇게 감사하고 편하게 느꼈던 것도 잠시 다시 내 앞에 닥친 현실 앞에서 나는 또다시 몸을 굳히게 되는 것을 종종 느낀다. 입으로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으나...’ 하고 고백하고 아직 마음까지 그 고백이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앉아서 지난 나를 되돌아보면 어떨 때는 참 웃음이 난다. 어떤 희극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목수아버지 앞에서 갓난아이가 자기 손안에 있는 나무토막만으로 집을 짓겠다고 하는 것처럼...손만 내밀면 그 아버지께서 완벽하게 도와주실 것을...
분원에서 생활하면서 주방이나 기도당번, 그리고 서원 사도직을 함에 있어 언제나 시작 전에 기도로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고 의탁한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내 힘만으로 해내려는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을 많이 느낀다. 그리고 자매나 수녀님이 도와주겠다고 하면 극구 사양하는 내 모습을 많이 보았다. ‘아니, 제가 할께요...’ ‘괜찮아..내가 할 수 있어..’
또 주방 사도직을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또 칭찬을 받게 될 때 겉으로는 겸손되이 웃지만 속으로는 그 칭찬에 만족하며 흐믓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야,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공동체를 위한 거야..'라고 반박해보지만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칭찬과 격려에 우쭐해지지 않았는지.. 그것은 반대로 수녀님이 충고나 조언을 하시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칭찬이 충고나 어떤 말이든지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또한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고 잘해야 한다는 교만한 생각 때문이 아닐까하고 반성하게 된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겸덕의 실천에서 생각의 겸손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고 내가 죄인이며 무보다 못한 존재이고 나의 약함과 내 안에 있는 악을 인정하는- 과 말에 있어서의 겸손 -자신에 대한 칭찬과 많은 말, 교정의 말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칭찬하는 말에 경계하는-, 활동과 삶에 있어서의 겸손 -새것이 아니라 낡은 것을 찾고, 일할 때도 가장 미천한 일을 택하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게 예외를 찾지 않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순간 나를 돌아보아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자신이 모든 자매들의 제일 끝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참아주는 인내에 감탄할 수 없다면 나는 아직도 완덕의 길로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종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자라면서 가족에게서, 친척에게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끝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 줬고, 또 내가 하는 일에 칭찬했고, 좋아했었다. 오히려 내가 앞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느끼며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도원에 들어와서 결코 내가 앞자리에 있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내 주위의 자매들이 모두 나를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한동안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런데 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제 느끼게 되는 것일까.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모두들에게서 칭찬 받던 내가 수도원에 들어오면서부터 나쁜 아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물론 아니다. 수도원에 오면서 내가 감추고 있었던 나의 숨겨진 부분들이 드러나고, 보여지게 되고, 또 나 자신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일까.. 입회 때보다 내 주장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졌고, 내 입장에서만 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때때로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들조차 의식에만 머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분원에서 있다보면(이제 두 번째이지만) 내 존재가 결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그것에 힘들어 할 때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다.
내가 이곳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인가.. 주방을 하면서 한참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은 결코 겸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폄하였고, 내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소리였다. 정말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아도 나는 이곳에서 중요한 사람은 아니다. 단지 배워가기 위한 과정의 한 사람일 뿐...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 내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누구에게서나 인정을 받는 앞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영역을...
예전에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어딜 가도 주위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우등생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활하다 보면 내 자리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고 또 어떨 때는 배제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나는 내 존재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처럼 내 자신도 마구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낮추어질 곳이 더 이상 없는 사람.. 내려갈 곳이 더 이상 없는 사람..
바로 성인들이 원하던 것인데,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투덜거리고만 있던 것이다.
오늘은 다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낮은 자로 오셨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결코 앞자리의 높은 사람이 아니라 뒷자리의 작은자임을 감사로이 여길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
내가 항상 다른 이를 참아주고 인내해주는...즉 위에서 아량을 베푸는 입장에만 있기를 원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내가 나 하나의 몫을 인내하고 있다면,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나에 대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몫의 인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겸손하다는 것이 단지 입으로 고백하는 나는 죄인이고 하찮은 존재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앞에서 그것을 못한다고 부인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참된 겸손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고서도 그것에 보답하기는커녕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단순한 사람은 자기가 갈 길을 잘 안다. 자신의 시야를 가릴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오로지 자기가 가야하는 목표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무사’라는 영화를 보았다. 한국영화로 엄청난 제작비와 호화 케스팅에 광대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하는 영화였다. 이야기 구성은 참 단조롭다. 명나라 사신으로 간 고려사신단이 스파이로 오인되어서 중국의 사막으로 귀향을 가게 된다. 그 와중에 원나라에 납치된 공주를 만나고 원나라 장수의 도움(?)으로 귀향길에서 풀리게 되지만 그들은 고려로 가는 것을 미루고 그들에게서 명의 공주를 구출하려고 한다. 명의 공주를 보호하면서 원나라 장수와 대결하고 마지막은 결국 무사로서의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안에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안에서의 관계... 어쩌면 무사라는 영웅적인 이미지보다 극한 상황에 처한 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모습들을 볼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여솔(노비-정우성)과 최정(장군-주진모)의 모습은 내게 어떤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이 둘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신분은 노비와 귀족, 피자유인과 자유인, 권력에서는 하위무사와 장군, 사랑앞에서는 적...
영화속에서 최정장군은 여솔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그는 노비출신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권위를 따르지 않았고 또 무술에서도 어쩌면 자신을 능가할지 모른다는 위협감 등으로 그를 무시한다. 그러나 여솔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객관적으로 보아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 없는 신분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대우에 대해 자유스럽다. 신분상으로는 여솔은 낮은자, 자유스럽지 못한 사람이고, 최정장군은 무엇이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 행할 수 있는 자유인이지만, 정작 자유인은 여솔이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가족도..’그의 말에는 슬픔이 배어있지만, 그 없음으로 인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스럽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갈 방향을 확고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여솔의 모습이 멋지고 또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내 안에는 최정장군과 같은 모습들이 참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판단, 사회적 위치, 명예, 드러남...등에 내 자신의 길을 내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단순하다는 것이 무엇일까..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단순한 사람은 가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단순이라는 것이 어떤 생각의 모자름이나 지적으로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사회적인 인식들이 가끔 내 안에도 있지만, 얼마나 이 시대가 단순한 사람들을 원하고 있는지, 또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단순하게 살아야 할 목적, 이유..그것은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라는 것을 다시금 내 안에 새기고 싶다.
여솔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부용공주라는 확고한 목적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그런 단순함, 자유스러움...
내 안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항구히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단순함과 자유로움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며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고 싶다.
3. 극기
극기에 대한 신부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시지만 우리 엄마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또 듣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하고 싶어도 ‘가족’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포기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것은 가장 나쁘고, 하찮고,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가족’을 ‘나’보다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했지만 난 그분을 위해서 나의 오관의 만족을 기꺼이 기쁘게 포기한 덕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가 가족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무슨 일 앞에서건 무의식중에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행한다. 그런데 나는 마음먹고 결심을 하지만 어느 순간 ‘나’를 위해 내 만족을 위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분원에 오면서 수녀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이 힘들고 또 많이 걸려 넘어졌던 것은 바로 혀의 극기이다. 그중에서 남에 대한 얘기, 판단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1차 분원 때 내 스스로 많이 힘들게 지냈던 것 같다. ‘수도자라면 이래야 하는게 아닌가?...’ ‘이렇게 살라고 배웠는데...’ 이런 생각과 판단들이 그냥 내 안에 머물지 않고 더 나빴던 것은 자매와 함께 그것들이 우리 삶의 걸림돌로 우리가 힘든 것이라고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비방’
“비방할 일이나 시건은 늘 있게 마련이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자. 오늘은 그 사람이 잘못하지만 내일은 우리가 그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랬다. 수녀님의 행동은 그것으로 잘못이지만 난 그것을 내 잣대로 판단해 버리고 또 비방하는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더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기쁘시기 하기 위해 선한 말만 해도 이 세상은 짧다고 했다. 그런데 내 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동안 많은 말이 선한 말보다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악한 마음을 담은 말을 퍼뜨리는 데 쓴다면 그것은 차라리 입이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번째 분원체험을 오면서 다짐했던 것 중 하나가 선하게 보고 선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수녀님들의 삶에 대해서 내 멋대로 판단하고 함께 있는 자매에게 나쁘게 말하는 것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1달이 된 지금까지 수월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내 스스로 많이 의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수녀님들의 삶이 아주 모범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듣고 배운 것과 다른 것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해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식하려 한다. 바로 내 안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또 다른 이를 보고 판단할 그것을 가지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바꿀 수 있기를... 이런 노력들이 결코 쉽지 않고, 또 나도 모르게 헛된 말이 나올 때도 있지만 주님께 맡겨 드리며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의 성 요한 전기(무에의 추구)를 읽었다. 성인은 가르멜을 개혁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인에게 나타나시어 ‘이제까지 나를 위해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원하느냐?’ 고 하셨다. 그러나 성인은 ‘고통과 모욕과 멸시받음을 원합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또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 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될수 있는 것이다...성인들은 얼마나 큰 십자가를 주시느냐에 따라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크고 작음을 측정했다”는 말씀을 읽었다.
점점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원한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느낀다. 분당 요한 성당의 대성당에는 큰 십자가에 금빛의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다. 그리고 신자들은 말한다. 다른 곳과 다르게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그 모습또한 멋지다고...
그런데 나는 그 성당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을 받았다. 제대주위가 모두 웅장한 회색의 대리석이고 번쩍번쩍한 파이프오르간이 양 옆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담담한 표정의 예수님 모습 또한 그러했다. 그 십자가를 보며 ‘더 이상 고통은 그만. 이제는 영광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고통의 십자가는 뒤로 미루고 부활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지내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 성당의 지하 소성당에 있는 십자가는 또 그와는 반대이다. 양팔이 처절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한없이 약하고 고개마저 앞으로 깊이 떨구고 있는 작은 예수님이 계시다. 그런데 사실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편해지고 더 가깝게 예수님을 느낀다. 이 모습에서 한없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좌절하고 약한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삶이나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 삶의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분들에 비해 나는 너무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감사하게 먹을 것, 입을 것, 생활하는 것 모든 것이 모자람 없이 주어졌다. 그런데 무엇이 내 십자가 일까...
그것은 나의 외적인 환경보다는 내 안에 있는 것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적인 광야보다는 내적인 광야에서의 시련, 단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뜻에 안 맞아, 내 마음에 안 들어, 내 시간이 필요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건데... 조금만 내 뜻에 안 맞아도 마음속에서 반발심, 거부가 일어나고 있다.
내 자신이 포기가 안 되고 있음이 지금 가장 큰 나의 십자가라는 생각이 든다.
4. 사도직
하루 하루의 힘을 주시길 청한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며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길 청한다.
바른 지향이 없이 사도직을 하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오늘 하는 사도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사도직의 바탕은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 복음에서는 죽은 외아들의 장례행렬안에서 한 과부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다가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 아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지신다. 오늘 복음의 과부, 딸이 마귀에 들린 이방인 여인, 아끼는 종이 아픈 백부장, 나병환자, 많은 병자들 그리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람들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측은한 마음으로, 슬픈 마음으로, 분노하시는 모습으로, 꾸중하시는 모습으로...
그런데 그 만남들의 깊은 심원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 사랑의 마음이 넘치고 계신다. 측은한 마음이나, 분노하시고 꾸중하시는 마음이나 그 안에는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도직을 하는 마음자세에 대해서 되돌아본다. 우리 서원에도 참 많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오신다. 평범한 신자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보이는 분들,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
이분들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대하진 못한다. 그분들의 상황을 고려해서 그분들을 만나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순수한 사랑 자체로서-으로 그분들을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피곤할 때, 여러가지 일로 지쳐있을 때, 마음이 언짢아 있을 때...
예수님의 사랑이 내안의 여러 가로막에 걸려 순수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도 순수한 사랑의 마음,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사도직에 임하겠다는 확신은 하지 못한다. 단지 그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안에 새길 수 있는 은총을 청할 수밖에 없다.
서원에 매일 오시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바오로성당에 다니시는 분이신데 세례명이 아타나시오인데도 우리는 바오로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분은 내가 분당에 오기 얼마 전에 영세를 하셨는데 영세받기 전에도 서원에 오셔서 가톨릭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어찌보면 그리 달갑지 않은 분이셨나 보다. 그런데 지금은 영세를 받고 나서 ‘하루에 한번이라도 바오로딸의 얼굴을 안보면 안돼!’하시면서 거의 매일 서원에 오신다. 늦게 믿음을 찾으셔서인지 자신의 연세 때문인지 그분은 여러가지 신앙에 대한 배움의 길을 찾으신다.
그리고 서원에 오실 때는 한 두가지씩 어떤 질문이나 의문나는 것들을 가지고 오셔서 책도 보시고 우리에게 묻기도 하신다.
한번은 나 혼자 있을 때 이것 저것 얘기 하시다가 왜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하고나서 영성체 하기 직전에 ‘주님 저는 당신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라는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셨다. 매일 미사를 하면서 그 중요한 시점에-영성체 바로 전에- 모두들 열심히 이 기도를 하는데 왜 그 순간에 그것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성당의 여러 선배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성령께 우선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한도에서 말씀드렸다. 그 말씀은 복음서에 나오는 말이고 백부장이 예수님께 드렸던 말로 지금 우리가 이 기도를 하는 것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그 백부장의 마음과 같이 하고 내 몸과 마음을 준비하게 하는 것 일거라고 얘기했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내 안에서 어쩐지 핵심이 빠진 듯이 느껴졌고 그분도 어느 정도 알겠지만 완전하게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고 그분은 내게 신부님들께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하셨다. 나는 얼른 그 답을 아시면 제게도 알려주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서 내가 잠시 없는 사이에 오후에 다시 오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그 답을 알았다고 하시면서 나를 부르셨다. 그것은 신앙고백이라고...
바로 옆에 있는 수녀님께 물어보시고 나서 바로 내게 알려주신 것이었다.
그분이 가시고 나서 그 할아버지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 갈망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질문했던 그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이분처럼 진리를 향한 강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원에 오시는 분들을 보시면 교리나 성서, 영적인 생활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 많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알아야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그 앎이라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앞서갈 수 있게 도와주는 앎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 앎,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자리가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내 자신부터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절실하게 하게 된다. 그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바오로 딸의 모토인 ‘세상은 비추는 작은 등불’이라는 구절이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 스스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불빛에 지나지 않게 보일지라도 그 작은 불빛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많은 배들이 모여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불빛을 제대로 비추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불빛을 내기 위한 동력-기도-과 그 불빛을 잘 비출수 있는 깨끗한 유리-복음3덕 생활-, 제 시간에 맞추어 불빛을 조절하는 등대지기의 마음-사랑-을 내 안에 담고 있어야 바로 사도로서의 자세를 갖추는 것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묵상하라>를 묵상하면서 또 이곳에서 분원체험을 하면서 느낀 것은 한순간도 잠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이 많이 와닿았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내 안에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있어서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을 또한 체험하면서 늘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무장하고, 더 많은 것도 아니고 그날 그날의 살아갈 힘을 주시길 청하며 바른 지향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2차 분원파견 동안 함께 저를 이끌어 주신 알베리오네 신부님께도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