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바오로의 고백

Sr.Julia 2008. 12. 10. 12:20

2002년 통신성서 과제로 냈던 정리와 묵상글!

 

바울로의 고백

- 예수를 아는 것 -


1.내용 요약

바울로 자신이 서간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각도에 따라 다마스커스 사건을 보고 깊이도록 한다.

“저희는 모두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에다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이다’ 하는 음성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자, 일어나 바로 서라. 내가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꾼으로 삼아 네가 오늘 나를 본 사실과 또 장차 너에게 보여줄 일들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서 구해내겠다. 그리고 다시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겠다. 그리하여 나를 믿고 죄를 용서받아 성도들이 차지할 몫을 나누어 받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 26,14-18)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혔을 때 당신은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필립비서의 자전적인 부분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는데 바울로는 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이며,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 사람중의 히브리 사람이고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바울로는 유다인의 전통과 개인적인 의무와 열정적인 자세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던 때에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혔다. 바울로는 자신의 현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도 소중한 보물이어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보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보물을 파괴하려는 위험한 세력에 대해 탄압과 죽음까지 불사하게 했고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위험인물이었다.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1디모 1,13a)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고 단지 자신의 보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로는 점차 자신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울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온갖 선의 근원도, 창조주도 아니었다. 그의 중심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것,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 보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이었다. 겉으로는 흠이 없는 올바른 사람이었지만 내심의 깊은 애착은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로의 전격적인 회전, 복음, 은총, 자비, 하느님의 호라도, 하느님의 무상적 개입의 새로운 요소가 솟아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까.

* 주님은 바울로가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에서 완전한 이탈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바울로의 모든 보물들, 그 자체가 아무리 값진 것이더라도 당신 앞에서 볼 때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이것은 갑작스런 윤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바울로의 내면에 비추어진 빛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봄으로써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필립 3,7-8 참조

* 바울로에게는 어떤 사명- 당신의 말씀을 맡기시고 전하도록 파견하심-이 맡겨졌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주셨    습니다” (갈라 1,15-16a)


-당신의 건너뜀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바울로에게 주어진 계시가 어떤 것이고 이것이 왜 회심보다 앞서는가를 살펴보면, 그에게 모든 것은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이런 것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한 적이 없다. 바울로는 모든 사람 때문에, 사람이 당신을 찾기에 앞서 항상 시작해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어야 할 인물이었으므로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회심하게 된 것은 바울로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었고 하느님이 이 회심의 작업을 시작하셨고, 끝까지 완성시켜 주셨다. 회심은 우리의 공로나 소망,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힘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라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것이다.



2.묵상

① 나의 내면에서도 바울로와 유사한 체험, 아니면 다른 어떤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한방울씩 떨어지는 낙수물이 바윗돌을 깬다”

어쩌면 내게 있어 하느님 체험은 이런 말과 같을지도 모른다. 바오로 사도에게와 같은 번쩍이는 빛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삶의 부분마다 나를 끌어주시는 분이 계심을 조금이나마 느끼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것또한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큰 은총과 선물이겠지만 지금까지 내 삶을 되돌아볼 때 하느님과 떨어진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열심한 구교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에 공부도 중요했지만 미사나 주일학교를 안가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때의 일도 기억되는데 엄마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은 하느님 다음으로 교황님이라고 하신 말을 듣고 반 친구들과 다투었던 기억이 있다. 대통령과 왕은 많이 있지만 교황님은 세상에서 한분밖에 없으니까 더 높다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었는데 이처럼 내 생활은 교회나 하느님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하느님께서 수없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겠지만 그중에서 내가 그 문소리에 귀기울이고 아주 살짝이라도 열어드렸던 그런 기억이 몇가지가 있다.

성당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을 때 내가 받은 수녀님에 대한 인상은 천사였다. 천사는 흰옷을 입어야하는데 검은 옷을 입은 것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그래도 난 수녀님이 천사인줄 알았다. 그래서 어딜가나 수녀님만 따라 다녔고, 수녀님이 앉는 자리에 나도 옆에 앉았고, 수녀님의 한손은 언제나 내 차지여야했다. 수녀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성당에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분, 그리고 아주 높으신 -하늘에 계실 정도로- 하느님과 사는 사람이니까 아주 거룩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유치원에, 미사에 그리고 주일학교에 가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아마 첫영성체를 마치고 나서 고모와 둘이서

‘나중에 크면 난 꼭 수녀님이 될거야’ 라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나의 비밀이었고, 그 약속을 하고 나서 마치 뭔가를 이룬 것처럼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때 장래희망 발표시간이 있었다. 모두들 거창한 꿈들을 말했었는데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수녀님이 되겠습니다.” 순간 반 친구들이며 선생님은 모두 놀랐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칭찬의 말씀을 해주시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 무언가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소중한 보물을 열어보이고 허탈해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나서는 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멀리 타지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곁에 없다는 외로움이 들었다. 그래서 성당에 더 잘다니기도 했지만 바로 그때 나는 바로 내 곁에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른 등교시간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가면서 내 옆에 예수님이 함께 걸으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신다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그러면서 가장 소중한 벗을 찾은, 부자가 된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에 갔다. 사실 이때는 수녀가 되겠다는 어릴적 희망보다 좀더 현실적인 꿈이 생겼다. 그렇다고 교회와 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가깝게 있지도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친구를 만나기 위해 교정을 걷다가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많은 남녀 커플을 보았다. 그때 내 머리속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생각이 ‘저들은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을 할수 있을까?’..‘나는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있었다. 'NO!'...‘이 세상의 누구도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아...단지 하느님께서만이 완전하신 분이지..!’

그리고 나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얼마동안 한 친구와 만나기는 했지만 이미 내 안에 다른 문이 열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난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문에 대해서 나 스스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그 문중에 하나가 열릴까?...하고.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바로 주님께서 그 문중에 하나를 열어 주시길 바랬다. 사실 내 스스로가 어떤 문을 선택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사실 어떤 문으로 들어가건 그 안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확실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 스스로, 직접 그 문을 열고 당신께로 오길 바라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문중에 하나를 열고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아직은 서툴고 한발 한발 떼어놓기 힘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 걸음 걸음마다 나와 함께 걸어주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가고 있다.

....바오로 서간을 읽으면서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왜 나에게는 바오로사도와 같은 그런 멋진 체험이 없을까?..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지만, 아직 짧지만 나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어쩜 그리 나의 걸음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주님의 놀아우신 은총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정말 ‘나’라는 단단한 바윗돌같은 마음을 당신의 ‘함께하심’, ‘사랑’으로 나를 당신께로 향하게 해주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린다. 


② 나를 오늘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해주시는, 모든 것을 미리 해주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내 생활 안에서 알아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복음(루가 1,57-66.80)을 읽으면서 어떤 분의 묵상이 생각난다. 즈가리야가 천가 가브리엘이 아들을 낳을터이니 요한이라고 하라고 했을 때 그는 늙었음에 대해 말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않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계획을 믿지 않았음에 대한 하나의 벌도 될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즈가리야에게 깊은 침묵-말할수 없음-속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뜻, 계획을 알아 들을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불순명의 죄로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할수 없는..즉 낮추어지고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행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바오로 사도 또한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아나니아가 왔을 때까지 눈먼 장님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바오로 사도는 어떠했을까, 그 내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까지 유다교라는 최고의 진리를 향해서 쉼없이 달려온 그에게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떤 정지의 시간, 되새김의 시간, 머뭄의 시간, 깊은 침묵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마치 즈가리야가 말 못하는 침묵안에서 하느님의 계획하심, 뜻하심을 찾았듯이 말이다.

내 삶에서 나를 존재케하시는, 모든 것을 앞서 해주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바로 이 같은 깊은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바쁜 일상안에서 침묵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도 그렇겠지만 내 마음에서 그런 침묵을 찾을 여유가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 보게 될 때, 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활동,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 그제서야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때 그 당시에 느끼지 못하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냥 흘러보냈던 것들을 후에 다시 되돌아보면 ‘아! 그랬구나’ 라고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활동에 감사드릴때가 있다. 또 때로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될 때는  그 안에서 내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곤 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선행을 하고 덕행을 쌓고 다른이에게 표양이 된다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어쩌면 그것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러 있어 주기를 바라실거라는 생각이 든다.

호세아 6장의 ‘내 마음을 알아다오’ 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처럼 하루 중 아주 잠시라도 하느님안에 머물러 그분이 내게 이루실 일, 뜻, 그 마음을 알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다.


③ 바울로에게 계시와 자비의 표지로서 나타나신 예수는 나에게도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왜 부르심 받았는가를 알게 해주고 계신가?

“하느님께서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나를 부르셨고....” 입회를 하고 나서 공동기도 시간에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 말씀에 대해 깊이 묵상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너무나 감동적을 다가왔다. 하느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 내가 입회를 할 때도 아니고, 세례를 받을 때도 아니고 또 내가 태어날 때도 아닌 더 이전에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나를 부르시고 나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나는 내가 누구이며 지나간 삶에 대해 생각해 보기보다는 그저 앞에 일어날 일들, 내가 되어야 할 미래의 ‘나’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고 또 그렇게 살아왔었다. 따라서 지나간 내 삶이 모두 내가 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해 왔었다. ‘내가 그만큼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만큼 해야돼’...라고. 단지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셨지만 그것은 성서 안에서 그리고 성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하느님이란 존재는 단지 교리적으로 나의 보호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그저 내가 필요할때만 하느님으로 찾는 분으로 밖에...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님이 계시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알수 있었다면 나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지나간 내 삶의 시간들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하느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주신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선물은 내게 주실수 있는 선물중 가장 나에게 좋은, 맞는 것을 주시려고 했음을 깨닫게 된다. 단지 그 선물을 얼마나 감사로이 하느님의 뜻하심에 맞게 가지려 했는가는 나의 응답이었음도 알게 해주신다.

하느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볼 때 나는 하느님의 것임을,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임을.. 알게 해 주신다. 또 나를 지금 이렇게 부르신 것도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부족하고, 내게 항상 눈길을 주시는 하느님을 너무나 쉽게 외면해 버리는 나를 보면 내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복음서에서 나병환자의 고백(마태 8,2)처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의탁하며 내게 주신 삶에 충실할수 있기를 청하고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하심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8-9)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대한 갈망으로 살 수 있기를 청한다.


④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장애가 될 요소가 내 안에 있지 않은가?

하루에도 몇번씩 하는 주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의 뜻, 계획이 무엇일까 오늘 내게 그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고 의식하지 못한채 지낼 때가 더 많이 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 계획에 온순하지 못하고 걸리게 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보다 다른 것이 더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본능적인 존재로서의 나이다.

내안에 내가 가득차 있을 때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 들을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마몬을 아울러 섬길수 없다”(마태 6,24) 고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내속에 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할 때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찾고, 내가 생각한 대로 처리하길 바라며,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내 몸에 편한 것만 하고 싶고, 내 자신이 다른 이에게 인정받기만을 원하고, 다른 사람이 항상 내 뜻에 찬성해주길 바라게 된다.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 뜻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하심에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나임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지만 매일의 삶안에서 다시 또 다시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나라는 존재가 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손길없이 하느님께 나아갈수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바오로서간을 읽고 또 많은 성인전을 읽으면서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총을 나에게도 주실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