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예수성심 공경-Rev.이제민

Sr.Julia 2009. 9. 10. 17:54

예수성심 공경

(이제민 신부 씀)

마음은 몸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마음이 없는 몸, 몸 없는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몸만도 마음만도 아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도 육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몸은 전체 인간을 나타내며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육을 체험한다면 살아있는 육을 체험하는 것이다. 정신의 최고 인식도 육으로 하게 된다. 육이 없이는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육이 없이는 사고할 수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없다. 육신이 피곤하면 정신도 피곤하다. 사도신경에서 육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전인(全人)의 구원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몸은 예수의 마음 없이, 예수의 마음은 예수의 몸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성체는 예수성심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예수성심은 성체의 중심이다. 예수성심의 체험은 성체의 체험이다. 세상을 신뢰하며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일생이 예수성심 공경에 대한 핵심이다. 이를 예수성심을 특별히 체험한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Maria Alacoque)와 그 이후 예수성심 공경의 역사를 보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예수성심 공경의 역사적-사회적 의미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물질주의, 세속화 경향, 환경과 생태계가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는 현재에 의미를 준다. 물질의 풍요화, 세속화로 영혼과 육체의 건강이 죽음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남아있는 마지막 신앙의 힘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구원을 희망하게 된다.

예수성심의 공경은 교회의 역사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 신심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수성심의 체험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교회에 선사된 역사적 체험이다. 과거에 행한 그대로 지금도 신심을 발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이 신심이 영구한 것은 아니다), 예수성심 공경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영성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체험이 활발하였음을 볼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영성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체험이 활발하였음을 볼 때, 또한 예수성심 공경과 그 전례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선언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이 신심은 단순히 과거지사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성심 신심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을 개인적으로만 그리고 내면적으로만 제한하고 사회의 절박한 실존적 물음은 뒷전으로 한다면 이는 그릇된 신심이다.

 

2. 마르가리타의 마음체험

1) 예수의 마음에 대한 공경은 성녀 마르가리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성녀는 마음으로 무엇을 체험하였을 까? 마르가리타는 에수의 마음을 체험하였다. 그 마음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별히 불교에서 마음은 종교심을 실천하는데 뿐만 아니라 진리를 체험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게 마음이 심장, 염통 이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의 중심, 모든 것의 핵심,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의 전부를 체험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인간의 마음이 따스하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따스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차갑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차갑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가리타도 이들 종교인과 원효처럼 예수성심을 체험함으로써 자신과 우주를, 그 마음을 깨달은 것일까?(원효의 득도 이야기를 보면 마음의 깨달음이 그 핵심을 이룬다. 원효는 마음을 깨달음으로써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원효에게 마음은 정결과 부정, 성과 속, 같음과 다름의 이원이 발생하고 극복된 마음이었다. 원효는 마음의 체험으로 땅과 하늘의 같음과 다름, 온 우주와 자신을 체험하였다. 마르가리타가 예수의 마음으로 체험한 마음은 원효가 체험한 그 마음일까? 마르가리타의 인생은 원효와는 다르다. 마음이 가리키는 원초적인 체험은 같은 것인가? 원효는 자신과 우주가 만나는 곳, 이 신비를 일심(一心), 공(空)으로 불렀다. 마르가리타가 체험한 예수의 마음도 일심, 공일까? 어쨌든 마르가리타가 체험한 예수의 마음은 자신을 비운 곳,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비운 마음이다.) 그에게 예수의 마음은 사물의 마음이고 온 우주의 마음이었을 까? 깨달은 원효에게서처럼 마르가리타가 체험한 예수성심을 우주와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까?

2) 성녀 마르가리타는 1647년 프랑스의 오탱 교구에서 태어났다. 파레 르 모니알(Paray le Monial)의 방문회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예수성심에 대한 신비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16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녀가 예수성심을 체험한 시기는 세계의 세속화(국가, 사회, 경제, 학문, 예술 등의 세속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리스도교의 신심은 점점 세계 내의 목적을 잃고 개인의 내면적이고 사적인 신앙결단 위에 세워졌다. 신앙은 세계와의 관계를 잃고 내면적인 것만을 강조했다. 각 개인은 내외적으로 신 부재(神 不在)의 상황, 말하자면 예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게쎄마니와 골고타로 특징지어지는 (마르 14,32 이하; 15, 32 이하) 상황에서 살아야 했다. 예수성심은 이런 죽음과 신 부재의 상황에서도 삶이 있음을 말해주며, 고독 가운데 가장 심오한 하느님의 가까움을, 무력함 속에서 하느님의 힘의 현현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르가리타가 받은 메시지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공통으로 고통 당하는 세계의 점점 증가하는 죄악과 신을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현존하는 사랑에 대하여 신앙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힘에서 나온 정신과 행위로 온 힘을 가지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신뢰하는 것이며, 속죄는 신을 부정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게쎄마니와 골고타에서 죽도록 고통을 당한 성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사랑을 이행하는 것이다.

마르가리타는 창에 찔리고 고통을 당하는 예수의 마음, 물과 피가 흘러나오는 마음, 창에 찔려 하늘과 땅을 향하여 그리고 땅과 인간을 향하여 열린 마음,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마음을 체험하면서, 이 마음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너와 내가 선과 악, 부정과 정결의 차원을 넘어서 만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체험한 것이었다.

 

3. 마음의 이해

예수성심 공경은 17세기의 신학적 상황에서 볼 때 삼위일체 맥락에서 정리되지 못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우리를 아버지께 중개하시는 분이시기에 신심과 케리그마의 근본 형태도 그리스도를 향하여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여 이다. 예수성심 공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를 향하여라는 교의를 생생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적 제약이 예수성심 공경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예수성심 공경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마음이라는 개념인데 예수성심 공경은 이와 관련하여 교회의 초창기부터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1) 마음에 대한 성서적 고찰

성서에서 심장은 먼저 인간의 중심적 육체기관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생명의 중심과 영적 힘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이 때문에 심장은 정서적 삶과 고통의 장소만이 아니라 인식과 사고의 장소로도 이해된다(1열왕 3,11). 마음에는 하느님 진리의 빛이 빛난다(2고린 4,6). 또 마음은 신앙의 장소이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 받을 것이고 의로움에 이른다(로마 10,9 이하). 더욱이 마음은 기억과 의지의 장소이며 결정의 중심이다(지혜 3,3). 온갖 규정들도 마음 안에서 파악된다(2고린 9,7). 열심한 사람은 마음을 억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로마 2, 29), 하느님의 요구를 따르도록 자신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으로 하느님이신 주를 사랑할(마태 22,37)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종속시키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마음을 억제하지 않는 자는 (사도 7, 51) 무정해진다(마르 10,5).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기의 뜻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래서 인간은 이를 알아야 하며, 또 자기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양심으로 이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로마 2,15). 잘못으로 잃어버린 마음의 기쁨을 다시 찾고자 하면 마음의 쇄신을 필요로 한다. 돌같은 마음에 새 마음이 들어서야 한다 (에제 11,19).

성서는 소박한 마음(사도 2, 46)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간의 전체적인 영적인 성향, 인간의 정서도 마음 안에서 중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순진성은 순수한 마음(마태 5,8)을 의미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4,32에서 그들이 한마음 한 정신이었다고 자랑한다면, 이로써 그들의 깊고 내면적이고 전체적인 인격을 파악하는 통찰이 강조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런 견해는 성서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때 인식과 사고와 의지결정과 정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2) 예수의 마음에 대한 성서적 고찰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르면 예수의 마음을 구원수가 흘러나오는 샘으로 불렀으며, 이 물은 새 모세(신명 8,15 참조; 사도 3,22; 7,37)가 자기 몸의 바위에서 증여하게 되고, 요한에 따르면 이는 성령이다. 예수는 생명수(이사 12,3; 에제 47,1-12; 즈가13,1)에 대한 메시아적 약속을 제시한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는 죽음의 고통에서 구약의 예언들이 이루어지고(요한 12,28; 13,31;17,4),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구멍에서 완성되었다(요한 19.34 이하). 첫 성령강림부터 창으로 찔린 주님의 심장에서 구원의 물줄기가 흐르게 되고, 베드로에 의하면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다.

교부들은 예수성심에 대한 가르침을 개별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으나, 원칙적으로 제시는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요한 4,14 이하와 19,34의 생명의샘(fons vitae)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소아시아의 예수성심 신학은 주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생명수의 샘에서 물(성세)과 피(성체)로 표시된 성사들의 부(富)를 보고 있다. 이 부는 인간이 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로부터 교회가 탄생했다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유스티노, 아폴리나리우스 등이 이를 대변하는 학자들이다. 이에 대해 오리게네스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주님의 마음을 그노시스의 생명수가 흘러나온 곳으로 이해한다. 이로써 요한 7, 37의 원초적인 의미를 성사에서 신비로, 사랑에서 인식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이 전통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등을 거쳐 중세의 신비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옆구리 상처로부터 솟는 은총의 샘에 대한 교부들의 신학은 중세기 초기에는 예수성심을 흠숭하는 권위의 토대가 되었다. 교부들의 예수성심론이 중세의 신심으로 건너간 역사과정은 덜 밝혀지고 있다.

3) 마음에 대한 신학적 고찰

(1) 마음은 원초적 단어(Urwort)이다. 마음은 인간의 낱말로 표현된 그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물은 화학부호 H2O이다. 그러나 시인이나 종교인이 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물은 H2O 이상이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준다할 때 이는 H2O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시인들이 쓰는 단어는 단조롭고 감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들로 체험된 것들은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이 대체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마음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해부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정의될 수 없으며 알려진 가치들로 조립할 수 없다. 이 단어는 원초적인 단일성과 전체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단어는 모든 단어에 나타나며 인간 언어 중의 가장 원초적 보화에 속한다. 이 단어는 일상의 체험을 초월한 단어에 속하면서 일상을 추상화하거나 피상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신비적이고 신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일상의 신비를 드러낸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게 하고, 체험될 수 없는 것을 시간 안에서 체험하게 한다.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시간 안에서 체험하게 한다. 이 마음의 체험은 곧 신(神) 체험이다.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런 신비적 존재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마음의 존재는 신비를 건드리는 존재이다. 영과 육, 행위와 마음씨,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단일성을 체험케 하는 이 단어는 이렇게 해서 인간이 신을 체험하게 하는 단어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로 나타나는 바를 이해할 때 인간은 자기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그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 마음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열려있는 존재임을 안다. 인간은 무한대로 열려있고, 신비와 접하고 있는 신비적 존재이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남 안에서 완성된다. 남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서 자기의 원천, 자기의 단일성을 깨닫게 된다. 남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갖는 그 원천을 마음이라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만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동물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동물은 자기의 고유한 원천인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 그들의 주변에 보이는 낯선 것만을 알뿐이며, 늘 망각 속에 산다. 동물은 심장은 가족 있어도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이 모든 것을 이름으로 규정했다면, 그래서 자기가 만나는 남들을 자기의식의 본질로 이끌어 들인다면, 인간은 그런 만남 가운데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남 안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면서 자기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음은 인간과 인간, 남과 나의 만남을 가능케 해준다. 인간은 이런 것을 깨달으면서 남을 만나게 된다. 나의 마음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되고 또 자기가 되어야 할 존재가 된다. 마음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단어이다.

(2) 마음은 선과 악, 성과 속, 미와 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곳이다. 역설적이지만 선만이 아니라 악일 수도 있다. 사랑을 거절한 무뢰한들이 추락한 심연일 수도 있다. 사랑이 메말라 버린 돌같이 차가운 것일 수도 있고, 아직까지는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대단히 말초적인 것일 수도 있다. 텅 빈 마음에 쓸쓸함을 느끼게도 한다. 이 마음을 깨달을 때 인간은 원초적인 단어를 깨닫고, 원초적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이중성을 극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상처 받고 모욕 받은 마음에서 위로를 얻는 것은 마음의 이런 이중성 때문이다. 한밤의 어두움을 지나 샛별이 마음에 떠오른 것같이 희망을 갖게 한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사랑하는 자이고, 최후의 심판도 진정 마음에서 사랑하였는가에 따라 행해질 것이다. 한국인의 감성에서 볼 때 마음은 한이 맺히는 곳이며 또 풀리는 곳이다. 마음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좌절과 희망, 증오와 용서가 화해하는 곳이다. 마음을 가진 자는 신뢰하고 사랑하고 희망한다.

4) 예수의 마음에 대한 신학적 고찰

예수의 마음은 선과 악, 성과 속이 만나는 한마음으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다. 예수의 마음은 원초적 단어로서 모든 초월과 범주, 이승과 저승, 시간과 영원의 만남을 시간 안에서 체험하게 하고, 체험 될 수 없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모든 인간의 체험을 안고 있는 이 마음을 만나면서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성심은 자기의 이 내면의 중심, 그의 원초적인 체험을 우리의 시간 안으로 우리의 컨텍스트 안으로 불러내게 한다. 예수의 그 가장 내면적인 중심은 하느님의 신비에 의해 충만 되어 있으며, 이 마음 안에서 우리는 공허와 무와 죽음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엄청난 모순을 일으키면서 하느님 자신이 선사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의 마음의 바탕에서 우리는 마음의 온 힘을 모아 이 사실을 신앙하고 고백하게 된다.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창에 찔린 그분의 마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게 된다. 그 위안이 단순한 심리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체험을 건드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창으로 찔린 사랑하는 그 마음을 통해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마음을 느끼며,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창으로 찔린 그 마음으로 향하게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가장 고유한 것, 자기의 구원을 남김없이 그리고 조건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실존적인 장소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그분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체험하게 되고 그분께 자신을 신앙과 희망 가운데 남김없이 그리고 조건 없이 넘기게 된다. 이 넘기는 행위는 인간에게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마음 안에서 창으로 찔린 마음, 스스로 죽음과 하느님이 떠나버린 절망에 빠진 마음, 그러면서도 세상을 심판한 하느님의 정의에 항복한 마음, 자기의 사랑을 이미 벌써 자기에게 선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 사랑을 모든 희망의 행위 안에서 희망하도록 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준 이 마음 앞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쳐다본다는 것은 이런 그분의 마음, 그분의 원초적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 영원한 신비, 이름 없는 무한, 모든 것을 감추고 그 무엇도 감쌀 수 없는 심연, 이 심연의 영원한 신비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하나가 되도록 가까워지고 또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당신의 영원한 말씀을 당신의 창조 안에, 우리 현존재 안에 진술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함께 인간은 자기의 삶 안에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께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고 계시며, 이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되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랑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마음을 이해하며 표현할 수 있다. 사랑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하나 되는 자만이 예수성심에 대한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원초적 체험에 가까워질 수 있다.

 

4. 예수성심 공경에 대한 교의적 이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신을 만나고 나아가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사랑하고 희망할 수 있는 마음을 체험하게 하는 이 예수의 마음이 마르가리타에게는 창에 찔린 예수의 마음으로 체험 된다.

예수성심 공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사랑이나 내면적인 삶에 대한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심장은 예수의 전인격에 대한 표현이다. 심장은 인간의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한번에 부르는, 말하자면 이들의 가장 원초적 단어이다. 마음은 인간육체의 한 부분인 심장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중심이다. 마음은 한 인물의 행동과 태도의 원초적인 단위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 인물의 행동은 모든 것을 종합하고 모든 것에 그 이상의 의미를, 마지막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주님의 인격의 중심은 최고의 사랑이다. 우리가 그분의 심장을 공경하는 것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영육을 지닌 전체인간을 위한 상징적 성격을 지니고 있듯이, 육체적 심장도 사랑인 마음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예수성심을 흠숭하는 것은 예수의 심장에 나타난 예수의 인격을 흠숭하는 것이다. 인격을 흠숭하는 것은 어떤 물건, 예컨대 상(像), 유해, 제도, 어떤 인물의 직권이나 관념 등에 대한 숭배와는 다르다. 한 인물의 숭배는 그 인물의 본질과 인물의 성품과 관계한다. 이는 그 인물의 자유, 역사성, 활동에 나타난 그 이상의 것과 관련한다. 그 인물은 그 이상의 것과의 관계에서 자유와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성심 공경에서 고유한 흠숭의 대상은 주님 자신이다(DS1561; 1563). 이 때문에 흠숭의 근본구조는 흠숭지례 의식의 구조를 가진다. 예수의 인물을 흠숭지례 의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인물의 가장 내면의 중심인 마음인 한, 그리스도 인물의 다른 부분(얼굴, 피, 손 등)도 공경할 수 잇는 것이다. 예수성심을 바라보는 것은 그분의 전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은 항상 전체 안에서만 옳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분은 인격 중심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 전체는 오직 인격의 중심인 마음을 통해서 옳게 평가될 수 있다. 예수성심 공경에서 마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흠숭지례로 공경하기 위한 근원이며 목적이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의 전인격을 공경하는 것이다. 예수 마음은 인잔 뿐 아니라 온 우주의 핵심이다. 또한 하느님 체험의 장소이며 우주만물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와 함께 우리는 인간만이 아니라 온 우주도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온 우주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돈도 물건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주는 물건이 아니며 인격체이다. 모든 것의 마음을 발견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예수성심을 공경한 사람은 모든 것의 핵심,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예수성심을 공경한 사람은 모든 것의 핵심,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공경한다.

예수성심께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바로 천주 성자의 가장 깊은 마음을 보여주신 그리스도 전체께 존경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데에는 인간 예수의 사랑만이 아니라 신인(神人)이신 예수의 사랑도 공경 받는다. 마음은 전인격의 중심을 나타내기에 마음에 나타난 사랑은 원래부터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인적 사랑, 즉 영원한 말씀의 신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사랑 안에 육화한 신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사랑 안에 나타난 신적인 사랑은 자기의 역사적인 현존과 구원하고자 하는 일편단심을 죄 많은 이 세상 안에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하시는 첫 말씀이며 마지막 말씀은 하느님의 정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신적 사랑이다. 신인적인 사랑은 인간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 사랑이 인간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상처받았다는 것이 예수성심 공경에서 강조된다.

예수성심께 드리는 흠숭지례 의식의 정점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이다. 봉헌과 속죄와 모방도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봉헌은 신비체 안에서 인간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성부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속죄는 특히 업신여김을 받은 마음에 대한 행위로서 주님이 아버지께 바쳤던 속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은 고통 가운데 우리가 속죄하도록 하셨다.

주님의 마음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이 사랑안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성령 안에 있는 자기의 가장 고유한 삶을 자유로운 은혜로서 선사하셨다. 이 사랑은 죄 많은 세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세상의 죄를 죽음에까지 그리고 죄인들로 인한 영벌까지를 참아 받고 그렇게 승리하심으로 자신을 선사하신 것이다.

예수성심 공경에서 우리가 세상에 자비를 베풀면서 세상의 죄 때문에 큰 슬픔 가운데 있는 주님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고와 실천은 교의적으로나 종교교육적으로나 올바른 해석이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관상하는 것은, 그리고 이를 위해 고통 받으며 죽어 가는 구세주를 적극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은 의심 없이 영신생활의 가장 중요한 수련 중의 하나이다. 이 관상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기도하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수난 사이에 있는 시간차를 극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화하는 것의 신학적, 신심적 의미는 현재화 한 사건 안에서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고, 관상자가 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분명히 파악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주님을 지금 존재하는 분으로 체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 삶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완성하고 또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열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의 현재화는 현재화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현재는 생각하지 않은 채 행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화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의 현재 안에서 자기의 현재를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을 현재화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하는 것은 고양된 주님께 바치는 기도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고양된 주님은 비역사적 신심의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역사의 원초적 원천(즉 마음)이 영원히 유효한 현재인 분임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기를 현재화하여 위로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위로 받기 위해 현재화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위로를 했다고 그리스도가 직접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현실이며 우리의 위로로 감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고통받는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받는 그리스도께 대한 기도로써 그분의 고통을 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이다. 2천년 전에 십자가로 인해 받은 고통이 우리의 연약한 위로로 덜어진다고 착각하지 말라. 만일 우리의 위로로 고통이 감해진다면 처음부터 그분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주님은 모든 시대의 인간들, 즉 자기 후에 태어날 인간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으며 또 당신의 지복직관으로 이 인간들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당시의 인간들로부터 위로를 받으셨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때의 그분을 위로한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위로하는 예루살렘의 부인에게 자기를 위해 울지 말고 그들 자신을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목적은 주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우리도 참된 사람으로 보답하고 주께 사해진 모욕을 보상하고 종말에는 완전히 그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알고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해 주님의 생애, 수난 및 지극히 거룩한 성체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주님의 성심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면서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 점점 비슷하게 되어 마침내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Ⅳ. 맺는 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걸까? 지금 우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의 질문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셨던 것은 무엇인가? 성체신심과 예수성심 공경은 이리하여 직접 역사를 사신 그분의 몸과 마음에 대한 신심이고 공경이다. 강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일생에 성체와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조배 하며 묵상하는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의 감정을 일으켜 눈물 흘리며 감동을 주기만 하는 觀想品目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흥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당신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 답답한 감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오라, 너희의 마음 안에 나를 모셔라, 내 앞에서 조배하여라 하시며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느끼게 하신다. 영성체와 성체조배는 일상에 쪼들린 우리가 그분의 느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를 당신께 불러 우리와 하나되신 그분은 우리더러 가라고 하신다. 우리가 현실을 벗어나 그분께 다가가 조그만 위로를 얻고자 하면, 그분은 매번 가라고 하신다. 그곳에서 당신의 체온, 당신의 숨결,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이들과 하나된 삶을 느끼라고 말씀하신다. 그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감실로 보며 그 앞에 꿇어 그들에게 봉사하라고 하신다. 가라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머문다. 그분이 오신 곳으로 우리는 가야 한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오라와 가라가 하나된 몸과 마음이다.

참다운 신심과 신앙은 이 몸과 마음에서 비롯하며 사회성과 현실성을 지닌다. 오라와 가라를 하나로 체험하지 못하는 데서 광신이 나오고 메마른 사랑이 나온다. 현실을 외면한 신심은 광신으로 변할 수 있고 신심을 게으르게 하는 현실참여는 메마른 사회사업일 수 있다.

- 끝 -

예수성심공경-이제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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