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환생과 그리스도교

Sr.Julia 2009. 9. 10. 17:58

(가톨릭신문연재.교황청 주최 심포지엄)

還生(환생)과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1. 왜 환생사상에 매혹되는가?

1) 환생에 대한 믿음

2) 힌두교, 불교의 '환생'과는 다른 새로운 환생개념

2. 그리스도 사상에 도전하는 사상

1) 교회의 배제

2) 환생은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에 도전한다

3) 信望愛 3덕의 실천으로 환생사상에 대한 대적

3. 환생은 과연 현대인에게 위안이 되는것일까?

1) 행복과 위안을 찾아

2) 자기 스스로를 구원

3) 과거의 삶에 집착

4. 환생이론에 대답하는 크리스챤의 통과 전례들

1) 환생 전적으로 부정

2) 사목자들 사전 지식 필요

5. 예수 그리스도는 환생을 가르쳤을까?

6.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구원

7. 환생에 대한 교회의 입장 표명

(참고)

1. 힌두교의 환생

2. 아프리카, 아프로 브라질(Afro-Brazilian) 전통종교의 환생

3. 환생론자의 성서로 여겨지는 '티벳사자의 서'

이러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게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화 종교적인 배경에서 그리스도교의 육체 부활신앙에 전적으로 도전하는 환생 이론이 서양 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의 새로운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현상을 진단분석하여 신자들에게 신앙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이러한 현상에 어떻게 용기있게 대처하며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로운 삶의 부화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깊은 신앙으로 살아야 할것인가를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성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의 사상을 분명하게 파악함으로써 실질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교회가 현 문화와 다른 길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과 대화함으로써 이들을 이해하며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참신성을 명확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1. 왜 환생사상에 매혹되는가?

1) 환생에 대한 믿음

환생에 대한 믿음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어 증가 추세에 있다. 유럽의 일반 사람들이 24% 환생을 믿는 반면에 가톨릭 신자들 중에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25%에서 35%로 거의 25%를 윗돌고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조사이다.

그러나 이들은 환생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환생에 대한 사상은 주로 뉴에이지 경향의 책자나 강좌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이 확산되는 이유는 영지주의 사상을 다시 회수하는 뉴에이지운동의 확산으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은 각각 별개의 것으로 되어 있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으며 세속화 현상으로 하느님이나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결여되고 있는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영적공허를 메꿀수 없는 염세적 문화 안에서 자기실현에 실패한 인간이 환생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바람에서 기인한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으로 인간의 행복과 평화, 조화를 보장한다는 매혹적이지만 거짓된 언약을 하는 이상한 사조들에 의해 환생은 인간을 완전실현 시키는 자기 구원 수단으로 등장되고 있다. 또한 물질주의 발전으로 대중문화가 경박한 낙관주의의 슈퍼마켓으로 변한 것도 한 이유로 들 수 있으며 현대인에게 돈벌이의 수단으로 등장해서 상품화 된 비술적인 종교와 영성들이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환생이론이 사람들에게 매혹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의 실용적인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환생요법을 통해 병을 치유하거나 죽음의 공포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한다던지 아니면 현재 삶의 나쁜 현상들 고통, 악, 복수, 범죄, 도덕적 책임감을 회피하거나 합리화 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나 그리스도교적 종말론 교리와 영성에 대한 가르침의 부족도 그 이유 중의 하나에 들어간다. 환생을 따르는 이들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주의 氣이며 영으로서 비인격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죽음후의 인간영혼의 불멸설은 믿고 있으나 영원한 인격적인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2)힌두교, 불교의 "환생"과는 다른 새로운 환생개념

뉴에이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혼합주의는 여러 운동의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현대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특히 붓다에서 그리스도에까지 더 나아가 수많은 종교의 스승들을 자체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환생론 역시 이러한 자체구원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뉴에이지 운동의 지도자중 한 사람인 엘리스 베일리(Alice Ann Bailey)는 점성학에 기반하여 지금부터 60년 후인 뉴에이지 즉 아쿠아리오 세대에는 환생에 의해 환전해진 새로운 메시아(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님)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대가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사상들은 세기말에 사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거짓 위안을 줌으로써 환생사상은 급속히 확산된다. 환생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술적인 예식과 비술(秘術), 비밀적인 의식을 따른다.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는 신앙의 사고에 준거한 환생은 전통적인 동양종교,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Karma)의 법칙에 의한 환생과는 차이가 있다.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이란 전생에 행한 행위에 의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인간이 자기완성 즉 열반에 들지 못했을 때 업(카르마)의 결과로 인간의 선택이 들어갈 틈이 없는 그리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며 부정적인 것이다.

이 환생의 주체는 업이 되며 인간은 업에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회는 바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와 사랑과 자비의 실천과 윤리 도덕적인 책임감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뉴에이지에서 나타나는 환생은 죽음을 끔찍이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해방을 제공한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환생에 있어서 주제는 업이 아니라 인간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가진 인격체로서 이 세상에 계속 태어남으로써 절대적인 존재(궁극적 실재나 가치)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식을 우주의식과 접촉해 자체완성, 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능동적인 존재가 되며 윤리 도덕적인 의무나 양심, 책임감은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때 하느님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윤리 도덕적 가치, 공동체적 구원, 타인에게 개방된 현재의 삶이 들어설 자리는 하나도 없게 된다.

 

2. 그리스도 사상에 도전하는 사상

1) 교회의 배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서 '제3 천년기'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환생사상을 완전히 배재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완성과 실현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뉴에이지 경향을 띤 환생은 아무런 의무감과 윤리를 부과하지 않음으로써 편하게 살려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매혹시켜 그리스도교에 도전하고 있다. 환생은 그리스도교의 지상에서의 일회적인 삶을 부정한다. 환생론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인간이 계속 태어남으로써 자아실현을 통해 스스로 구원된다는 명목 하에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환생은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이른다는 신앙의 근원이 아니다. 즉 뉴에이지에서 제안하는 해방이란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2) 환생은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에 도전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겸손되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환생사상에서는 이와 반대이다. 자기 힘으로 구원되는 환생에서는 하느님의 용서나 은총, 구원이 들어갈 하느님의 자리가 없다. 뉴에이지 형태로 나타나는 환생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역사에 들어오신 자비로운 하느님을 부정하며 우리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주기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멸망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스도인의 이 지상의 삶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삶이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죽음 후에 하느님 안에서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영이나 천사가 아니다. 육신은 나라는 존재와 뗄 수 없는 부분인 성령의 궁전이다.

이것은 환생에서 육신을 경시하는 사상과는 정반대된다. 환생에서는 육신은 인간의 의식 확장을 통한 자기 구원을 위해 계속적으로 사용해야하는 잠깐 입었다가 벗어 버리는 옷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의 육신은 이와 반대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며 영혼과 육신이 두 개로 완전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도 살아을 때와 같은 성품, 정체성과 인격성을 가진 육신부활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이 무조건적인 선물은 거듭되는 환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일어나며 그리스도의 부활안에서 벌써 완성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벌써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혼과 육신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보증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시킨 하느님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죽을 육신도 살린다.

3) 신망애 3덕의 실천으로 환생 사상에 대한 대적

환생사상이 개인 경험, 개인의 구원만을 중요시 하는데 반해 그리스도교는 개인경험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경험과 구원을 중요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공동체안의 형제애를 증거된 사람을 통해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부활에 도전하는 환생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교회는 육신 부활이나 종말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본교의를 미사 때나 강연을 통해 신자들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쁨,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다. 진정으로 삶을 산 사람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환생론자들처럼 죽음을 회피하고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안에서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쓸모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한 삶을 사랑하기 위해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계속적으로 되돌아오는 환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으로서 영, 육이 변형되어 승천하신 성모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부활, 종말론적인 삶을 사랑하면서 지상의 삶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희망과 가쁨의 원인이 된다.

 

3. 환생은 과연 현대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 일까?

환생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양립될 수 없는 사상이다. 환생을 믿느냐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믿는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현대인들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얻으려고 한다. 현대의 부정적인 사건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전생의 삶과의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환생론자들은 환생을 믿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믿는 것이 진정한 위안을 제공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행복과 위안을 찾아

앞에서 우리가 보아왔듯이 뉴에이지의 환생은 힌두교, 불교의 환생과는 달리 인간이 환생의 적극적인 동인으로서 행복과 위안을 느끼려고 한다. 환생사상에서 이러한 선택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내생의 삶을 규정한다. 그렇게 될 때 어린아이가 태어나 얼마있지 않아 몹쓸 병에 걸려 죽는다든지 청소년들의 자살, 에이즈 환자들의 고통, 수많은 유대인의 가스실의 학살 죽음 등과 같은 처절한 상황도 모두 전생의 자아나 부모들의 선택이라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진정 위안이라고는 볼수 없을 것이다.

환생사상에서 위안을 얻는 또 하나의 이유는 수많은 환생을 거듭함으로써 정신적 영적으로 더 성숙되고 완전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옛날보다 현대는 인간의 탐욕에서 일어나는 전생이나 윤리 도덕적 질서의 파괴에서 야기되는 악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결국 성숙된 완전한 인간 실현이 이루어 졌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죄나 악은 더욱더 확산되고 있으며 개인의 정화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제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종족전쟁(옛 유고슬라비아, 자이레)이나 나찌즘에 의한 많은 사람들의 학살등이다.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악은 인간의 자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자 하느님의 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환생론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을 진지하게 보지 않으려고 하며 인간의 힘을 과장하여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의 죄악의 세력을 이기셨고 인간의 잘못은 용서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환생사상 안에서는 자기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짐을 함께 지고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를 거부한다.

② 자기 스스로를 구원

또한 환생사상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깨달음이나 자기실현, 성장이라는 구실로 하느님이 명하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지 않아도 되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의 결정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자신의 힘든 노력에 의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또한 이 세상의 삶에서 자신이 더 나아진 영적성숙을 볼수 없는데 내생에서 더 완벽한 인간이 되어 구원되리라는 보장을 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상만으로 가능할 뿐이다.

과연 환생사상은 낙천주의 사상일까?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자체구원을 주장하는 환생사상은 어떤 면에서는 현대인들을 매혹시키지만 무책임한 낙천주의라고 볼수 있다.

환생론자들에 의하면 전생에 대한 회상은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이들의 위안거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전생의 경험들은 현재의 어떤 상황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내가 누구였는가"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위안을 제공한다고 한다.

전생회상은 자막에 새겨진 유아기 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들을 대변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면술에 의한 퇴행적인 기억으로 유아기 때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과 기억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사목적인 면에서 중요하다. 유아기의 경험으로 되돌아가는 이러한 정신분석적 방법은 유아기 때로 되돌아 감으로써 그 때의 경험들을 현재의 의식 상태로 떠올려 현재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장애를 해결시키고 자기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내적인 갈등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는 점에서는 이 방법의 유용성은 고려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나 경험들이 마치 한 개인이 전생에 지금과 똑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고 주장할 이것은 치료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것으로 상상에 의한 강압적인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대의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대의 어떠한 전생회상도 환생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뉴에이지의 환생론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하는데 지금의 '나'라는 존재와 전생의 '나'라는 존재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전생의 '나'라는 존재는 전생에 있어서 한 개체이며 지금의 '나'는 동시에 자동적으로 동일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전생의 다른 개체인 '나'의 경험을 살피게 될 때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그 '자신'이 아니게 된다.

③ 과거의 삶에 집착

그리고 환생론자들은 항상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전생의 영적인 삶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는 현재의 삶을 볼 때 이 이론은 확실성이 없는 것이다. 환생론에서는 전생의 경험과 기억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 미래의 생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는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지만 미래는 인류에게 항상 개방되어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지우려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또한 환생을 믿음으로써 과거의 삶에 집착해 현재의 삶을 등한시 하는 것은 한 인격체의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데 위험한 것이다.

전생의 모든 경험들이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자기의 전생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전생의 자기가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살인자 등) 이러한 기억은 현재의 자기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심리적 정신적 부담과 불안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생회상에 대한 신뢰는 현재의 삶에 자유보다는 구속을 제공한다.

이처럼 환생은 마치 위안처럼 과장되어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결코 위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환생을 믿는 이들은 이러한 이론밑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진지하게 사고하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결국 돌파구가 없는 벽에 감금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사목자들은 신자들의 생활과 신앙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도와주어야 한다. 가령 환생을 믿고 그리고 그것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현재의 삶을 도와준다고 확신하고 있는 신자들이 사목적인 도움을 청해올 때 사목자들은 이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지만 항상 진리이신 그리스도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면 이때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4. 환생이론에 대답하는 크리스챤의 통과 전례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통과 전례는 오늘날 넓게 확산되고 있는 환생에 대한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환생에 대한 성교회의 독트린에 의한 답변은 전례 안에 보여 지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① 환생 전적으로 부정

성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통과 전례는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앞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응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전레는 "비아티쿰"(Viaticum. 봉성체)과 "의례"(Commendatio), 장례식(Funerals)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례는 가톨릭 교회의 믿음을 이해하고 신앙을 성숙시키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 육체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마 전례 안에 보여지는 통과 전례는 죽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순간에 시작하는 것이다. 비아티쿰은 via와 ticum이 결합된 말로서 망자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여행을 막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를 영하게 함으로써 망자를 격려한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마지막 날에 부활된다.

비아티꿈에서는 또한 시편 114장이 응송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파스카 신비의 차원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례성사를 통해 물속에 잠김으로써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벌써 아버지의 나라로 통과하고 있다. 비아티꿈의 전례는 죽음이란 최상의 파스카의 신비이며 또한 죽음이란 하느님 나라인 저 세상으로 가는,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하지 않는 결정적인 여행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의례 전례에서는 죽음에 임박한 신자를 위해 예절문을 염경한다. 이 기도문은 8세기 때부터 전통 안에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망자에게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죽음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인간 측의 응답이다. 이 전례에서는 망자의 여행은 바로 하느님 품에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죽은 이들이 천상의 시민으로서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마지막 날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여기에는 환생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다. 한 인격의 완전 실현은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인 장례예식에서는 초기 로마 전례에서 볼 수 있었듯이 망자의 육체에 대한 존경심이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세례성사를 통해 성령의 궁전이 되었으며 마지막 날 일어날 육체부활에 대한 존경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끝으로 육체를 땅에 묻는 장례식은 그리스도의 장례식과 연결되어 있다. 묻힐 자리를 측정하는 이유는 죽은 육신은 무덤에 묻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육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리라는 희망의 징조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장례의식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파스카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장례식은 각 나라와 각 지방의 환경과 전통에도 밀접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언명한다.

② 사목자들 사전 지식 필요

그렇지만 뉴에이지의 환생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장례미사에서 독서나 상징, 음악을 선택함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거나 그리스도교 교리와 대치되는 제안을 해올 때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나 부제들은 이러한 경향을 선별할 수 있는 사전 지식을 가져야 한다. 사목자들은 그들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복음적 메시지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환생사상은 어쨌든 성교회가 집전하는 통과전례의 성격상 보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환생을 가르쳤을까?

환생론자들은 그들의 환생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성서에서 환생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환생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 자체를 부정한다. 초대교회의 주된 사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기쁜 소식과 하느님의 사랑, 은총과 용서의 기쁜 소식에 중점을 두었지 환생을 통한 인간 실현을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환생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를 환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이 태어남은 환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로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이것을 다시 설명하신다. 니고데모의 몰이해 즉 "다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4절) 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화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나라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업(Karma)에 의한 환생사상을 단호이 부정하신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 "자기의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1-5참조)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주셨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에서 한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거나 아니면 부모의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라는 그 당시의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환생에 대한 믿음의 반영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부활을 보여줌으로써 환생을 부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성서는 히브리의 문화권 안에서 쓰여진 것이지 환생사상을 가진 인도를 배경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의 주된 사상 조류와 일반적인 믿음은 영혼 불멸설이었지 환생론이 아니었다.

 

6.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구원

모든 인간의 희망을 다루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인간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을 제공한다.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일회적인 지상의 삶 안에서 자기의 실현과 완성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것은 지금보다 나은 어떤 다른 장소나 어떤 더 나은 때나 조건 혹은 행복의 상태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구원 사업의 중심과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 집중된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최종적인 실현과 완성, 그리고 휴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의 부활에 삶

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환생론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육체"에 대한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체(그리스도를 통해)를 취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으며 그 육체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마지막 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데 기반한다. 성서에서 보여지는 육체의 의미는 또한 육체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총화성 안에서 全人(전체 인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환생론자들이 주장하는 자기 혼자 구원만을 위해 노력하는 폐쇄적 존재와는 달리 세상과 인간에게 개방되어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의미하며 개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에페 2,8-9 참조)에 의한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은 일회적인 지상의 삶에 참여하는 것만이 남아있다. 이러한 삶에의 참여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살 때 이 세상에서 벌써 지상적 삶을 초월하는 종말론적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

"종말, 에스카토스(Eschatos)"라는 말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보다는 "구원에 대한 현실적인 경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예수께서 시간적인 역사 속에 들어온다는 의미보다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가 완성된다는 의미, 즉 이 세상의 모든 것, 시간과 역사가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인간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해 벌써 하느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것 안에 완전히 명백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지막 날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처벌보다는 희망이다.

 

7. 환생에 대한 현 교회의 입장 표명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복음전파에 도전하고 있는 환생사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살펴보면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환생이나 그와 비슷한 용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단지 공의회는 지상에서의 일회적인 삶을 강조하며(히브 9,27) 주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 축복받은 이들과 같이 지낼수 있을 것이라고(마태 25,31-46) 명확하게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48항 참조).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인간의 지상에서의 일회적인 삶을 강조함으로써 환생론자의 사상에 반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환생사상이 그리스도교의 독트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임을 표명한다. 교황께서는 1992년 5월27일에 가졌던 신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에게 "육체로부터 망명(환생)"을 넘어서게 하며 우리는 주님에 의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천상의 새로운 삶 안에서 개인 자신의 충만한 정체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진정한 육신부활이다. 이것은 다른 육체를 빌려 이 세상에 계속해서 태어나는 환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교황께서는 또한 회칙 "제3천년기"에서 그리스도교의 계시 자체가 환생을 배제하며 인간완성(완전한 자기실현)은 바로 영원한 당신의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오신 하느님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바로 그리스도교 시간(역사)의 탁월한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그 이유는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시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교리서(1013번)에서는 환생이란 우리 각자 행위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잃게 하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의 결정적인 책임감을 잃어 배제시키며 지상의 삶의 의미를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그리도교의 인간학과 배치된다. 또한 환생론자들은 한 번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론에 완전히 배치된다. 그러므로 성교회의 환생에 대한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는 역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현행의 문제점을 다룬 '국제신학위원회'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이 다른 몸을 빌려 계속적으로 태어나는 환생사상은 이교도에서 태어났고 그리스도교의 성서나 전통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상 일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환생은 이원론(Dualism)이다. 즉 육신은 단지 영혼이 자기를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지상의 삶이 끝나면 육신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영혼은 다른 육신을 빌려 환생하게 된다. 또한 종말론적인 면에서 보면 환생론자들은 육신 부활과 영원한 단죄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환생론자들이 자신의 힘에 의해 구원된다는 자체구원을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적인 인간 구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서 야기된다.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정될 때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이나 성사론 은총론들은 모두 가차없이 부정되고 만다. 즉 환생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자체를 부정하고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외에도 환생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목적 입장표명은 여러 나라의 주교들의 서간에 나오고 있다. '망자(죽은이)에 대한 고려'를 다룬 독일 주교회의(1994)에서는 죽음 후의 인간의 신비로운 삶이란 항상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죽음 후에도 한 개인의 정체성(자신이 살았을 때와 같은)은 계속 존재하고 살아남는다. 육체 부활에 대한 희망의 의미는 환생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영에 의해 변화된 새로운 육체(영체)를 가진다고 언명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른들을 위한 교리,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탈리아 주교회의(1995)에서는 환생사상을 해석하면서(1202)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은 아주 짧지만 명백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삶은 일회적이기 문에 환생론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번의 삶을 통해 자기 정화를 시켜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는 이론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항상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정화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참고도서>

김웅광, "뉴에이지 운동의 정체," 국민일보사.

 

[힌두교의 환생]

힌두교의 거의 모든 학파에서는 환생을 믿고 있다. 그러나 환생은 힌두교의 근본 교리를 형성하는 사상이 아니다. 즉 힌두교의 최종적인 종교적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윤회의 쳇바퀴(karma samsara)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방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힌두교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변하고 시간적이며 파괴되는 육신과 영원히 불멸하는 아트만(atman)이 라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트만이 결합되어 있는 육신의 조건은 업에 의존하는데 업이라는 것은 한 인격체가 지상에서 행한 모든 행위의 도덕적인 총합체이다. 모든 행위는 여지없이 그 결과에 따르는 열매를 가져오는데 좋은 행위를 했으면 좋은 업, 나쁜 행위는 나쁜 업을 만들어 낸다. 이 업에 의해 태어남,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끝없는 윤회가 계속된다.

기원전 1200년에 만들어진 '리그베다'에서는 죽음이나 영혼불멸에 대한 사상은 발견할 수 있어도 환생에 대한 사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기원전 900년에 만들어진 '브라마다 베다'에서도 윤회에 대한 교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죽음과 공포에 대한 서술과 그것을 이겨내는 의식을 다루고 있다.

'우파니샤드'(upanishads)에서는 윤회사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인간은 이생에서 자신이 한 행위에 의해 내세에 좋게도 나쁘게도 태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종교생활로 자기 정화와 도덕적 윤리적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영혼의 윤회에 대한 민중종교를 살펴보면 '바가바트 기타'(bhagavat gita)에서는 인간의 영혼 아트만이 계속되는 환생에서 이 육체에서 저 육체로 이전한다. 그리고 착한 행위를 한사람은 좋은 가문에 대어나고 영성적인 인물로 태어나며 이러한 윤회를 계속함으로서 최종목적인 완전(moksha)에 도달한다고 한다.

'프라나스'(puranas)에서는 죽음 앞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환생을 향한 죽음의 과정을 다루는데 죽음의 상태에서 아트만은 업의 열매에 따라 정밀체를 취하게 된다. 태어남의 과정은 한 인간의 업에 의해 규정되는데 지바(jiva)라는 영혼의 존재가 인간으로 태어난다.

'가루다 푸라나'(gaurda purana)에서는 업보다 지바가 인간의 태어남을 좌우하며 한 아이의 태어남은 그의 아버지의 업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 운명이라는 것도 환생의 큰 요인으로 작용된다. 그러나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은 운명을 이길 수 있다고 프르나스에 서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업을 이길 수 ,있으며 이것은 신에 대한 봉헌된 마음, 보시와 착한 행위, 명상, 순례, 그리고 물질적인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하다. 베다나 바가바트 기타. 프라나스나 그리고 다른 힌두교의 종교서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환생이 아니라 궁극적인 인간의 행방과 구원이다.

그러므로 환생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힌두교도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다. 힌두교의 영혼의 환생은 정화를 필요로 하는 연옥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생에 대한 교리는 기본적으로 나쁜 상태이자 낙관적이거나 낭만적인 구원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교의 원죄와 같은 상태로서 인간의 노력이나 극복이 필요한 상태이다.

[아프리카 , 아프로 브라질(Afro-Brazilian) 전통종교의 환생]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의 종교들안에서 원시적인 믿음이나 환생에 대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신을 창조주나 생명자체로 믿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각자의 영원한 생명이나 영혼불멸을 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신적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적인 삶에 참여한다는 춤이나, 기도, 희생제물, 신에 대한 숭배 예식 등으로 아프리카 종교성의 특색을 규정한다.

아프리카 전통에서는 인간의 삶은 일회적인 것이다. 아프리카 전통 안에 신은 부족을 창조한 신이며 종족을 창시한 이들은 마치 그 종족의 중요 멤버로서 원로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조상숭배는 아프리카 종교성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 조상들이 신과 가까운 곳에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영이 계속 살아 있다고 믿는 영혼 불멸사상은 환생에 대한 믿음을 배제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아프리카인도 환생하여 다시 태어나 가족이나 부족 종족의 역사를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다. 즉 부족에 소속되어 신들이나 조상들에게 봉헌 제물을 바치고 신과의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에 참여하는 개체는 어떠한 환생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개인의 삶은 일회적이며 다시 번복될 수 없는 것이다.

영혼 불멸 사상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은 남아 살아있는 사람의 기억에 남는다. 즉 단지 영성적인 차원에서 남아있지 육체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존강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로-브라질 전통종교에서는 어디서나 존재하는 전지전능하신 유일한 최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에게 예배를 드린다. 이 신뿐 아니라 오리삭스라는 신들을 경배한다. 그들은 형체가 없으며 단지 그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자들만이 형태를 지닌 존재로 나타난다.

아프로-브라질 전통종교는 '신들린 종교'로 불리어지는데 이러한 현상은 공적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중의 몇 명이 황홀경(Trans)상태에서 신이 들리는 현상이 있다. 이것은 신경이 아주 예민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프로-브라질 전통종교는 일반적으로 비술전수적인 종교인데 스승의 지도하에 비밀적인 전수식에 의해 신자가 된다. 그러나 아프로-브라질 종교 안에서 환생의 믿음을 찾는다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신자들의 예배의 중심이 신들인 오리삭스(Orixas)와 그의 전령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투스(Bantus)라는 아프리카에서 온 종교에서는 환생에 대한 믿음의 흔적이 있는듯하나 어떠한 자료도 이를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수단전통에서 나타나는 신들은 오리삭스, 원래는 조상신들이 신격화된 존재로서 인간과 접촉할 수 잇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댜시 환생하지는 않는다.

전통종교에서는 신들린 사람들은 있어도 환생은 없다. 단지 환생에 대한 믿음은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으로 혼합주의 예식을 거행하는 "Valedo Amanhecer", "Cida de Ecletica"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해서 믿어진다. 이것은 현대 브라질 문화안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아프로 브라질 종교라고 볼 수 없다. 이들은 가톨릭 교리와 아프리카 전통,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믿음, 접신주의 등 다양한 종교들을 혼합시켜 여러 가지 표징, 예식으로 많은 사람들은 유혹하며 환생사상을 퍼뜨릴 수 있다.

환생과 그리스도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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