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
어릴 적 제 사진을 보면 항상 앞머리가 눈썹까지 덮고 있습니다. 이마가 꽤 넓어서 친구들이 ‘대왕 운동장’이라고 놀리는 것을 듣고부터는 성인이 돼서도 최대한 이마를 가리고 다녔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마 가리기를 지상 과제처럼 여겼던 제가 수도원에 와서는 평생을 이마를 내놓고 살고 있습니다. 처음 수련 베일을 썼던 때가 생생히 기억납니다. 머리카락을 모두 베일 속에 감추고, 대신 그토록 감추고 다녔던 이마를 완전히 내놓자 거울 속 제 모습이 딴 사람인 것 같아서 꽤 어색해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낯선 제 모습에 수녀님들은 “왜 그 이쁜 이마를 그렇게 가리고 살았어?” 하시며 친절하게 얘기해 주는 분도 계셨고, “이제 형광등 없어도 살겠다!”라며 웃기도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어쩌면 평생 베일을 쓰고 살아야 하니까 제 모습을 받아들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넓은 이마를 내놓고 잘 지내고 있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 이마 얘기부터 꺼내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하시는 분도 계시겠죠? 오늘 소개해 드릴 영화 <WONDER>(원더)의 주인공을 보며 문득 예전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영화는 2017년에 개봉된 것인데, 올해 초에 다시 재개봉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주인공은 열 살 꼬마 어기(어거스틴)인데, 포스트를 보시면 알겠지만 어기는 우주비행사 헬멧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겠구나 싶지요. 영화가 시작되면서 어기의 독백이 흘러나옵니다. 어기는 또래 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게임기로 마인크래프트를 하고 아빠와 함께 광선검 결투를 즐기며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꿈도 가지고 있는 평범해 보이는 소년입니다. 하지만 어기 자신은, “난 평범한 열 살 꼬마가 아니다. 평범하지 않은 생김새, 태어날 때도 평범하지 않았다.”라고 고백합니다.
어기는 자신이 태어난 때를 ‘웃겼던 순간’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곧바로 반어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기가 태어났을 때 의사와 간호사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부모에게 아기를 보여주지도 않은 채 큰 수건으로 감싸 안고 방을 뛰쳐나갑니다. 안면기형인 아기의 얼굴을 보고 엄마 아빠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죠. 이후 열 살이 될 때까지 27번의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얼굴 가득 수술 자국과 기형적인 모습이 남아있어서 종종 우주비행사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외모 탓에 외출은 쉽지 않았고 학교에 가는 대신 엄마에게 홈스쿨링을 받으며 거의 집안에서 지냈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기가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은 어기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깁니다. 엄마의 모든 생활은 어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아빠는 어기의 기분이 저조해질 때마다 우스개 소리하기에 바쁩니다. 그의 누나 비아 역시 아직 부모님의 애정이 필요한 때이지만 자신보다 동생 어기를 더 소중하게 돌봅니다. 어기네 집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작은 우주 같습니다.
그나마 평온하게 지내던 어기와 가족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어기가 학교에 가면서 부터입니다. 어기의 학업이 홈스쿨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자 그의 부모는 그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지요. 물론 입학을 권하기는 했지만 어기의 엄마 아빠에게도 어기의 학교 입학은 정말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부모는 어기가 학교에서 또래들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언제까지 어기를 집에만 둘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영화의 전개는, 조지 캠벨이 설명한 영웅의 여정처럼 안면기형 소년인 어기가 외면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직하고 솔직한 내면의 강함을 키우면서 영웅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어기는 자신이 안전하게 여겼던 집을 떠나 헬멧을 벗은 채 학교라는 모험의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했듯이 어기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지요. 자신과 다르게 생겼고 어딘가 아파 보이기도 한 어기를 보면서 아이들은 겁을 먹고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학교에 온 어기이기만 아이들의 노골적인 따돌림에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영웅의 여정에서 난관에 부딪쳐 소명을 거부하며 멈칫하는 단계이지요.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예’라고 응답하며 다가오는 의인들이 있습니다. 친구 써머와 잭, 그리고 이들 뒤에서 조용하지만 아이들의 길을 바르게 인도해주는 터시먼 교장 선생님과 브라운 선생님이 그들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어기이지만, 어기 주변에 있는 이들 역시 영웅의 협력자 또는 또 다른 영웅들로 소개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어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누나 비아의 내면 이야기, 비아와 단짝 친구 미란다의 성장통, 처음 어기를 보며 가식적으로 행동하던 잭이 어떻게 그의 진짜 친구가 되어 가는지 차례로 보여주며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를 홀로 두지 않고 지지해주고 친절하게 지켜주었던 이들 덕분에 마침내 어기는 영웅으로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귀환할 수 있게 되지요. 학교를 졸업하면서 어기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메달을 수여 받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자신을 향해 모두 일어나 환호를 보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어기는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다면 평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평생에 한 번은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어기의 시선에는 자신을 향해 애정 어린 박수를 보내는 그의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친절함이 있었기에 어기가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까요!
<원더>에는 기억하고 싶은 좋은 대사와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어기의 졸업식 전에 아버지와 어기의 대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기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그의 우주비행사 헬멧이 사라진 적이 있었지요. 사실 그것은 어기의 아버지가 숨겨놓은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묻는 어기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종일 헬멧을 쓰고 다니니까 숨긴 거야. 네 얼굴을 볼 수 없잖아. 나는 네 얼굴이 좋아. 내 아들의 얼굴이니까! 나는 너를 보고 싶었거든.” 어기와 눈을 맞추며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제 마음이 더 뭉클해졌던 것은 이 장면에서 저의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제 넓은 이마를 아버지께서는 참 좋아하셨거든요. ‘왜 이쁜 이마를 가리고 다니는데?’ 하며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느님 아빠가 연달아 연상되었지요. 그분은 내가 못난 얼굴이어도, 이것저것 실수도 많고, 한계와 부족함이 많아도 나를 더 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으실까? 하고요.
<사목정보> 2021년 7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