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유감(2)
김진태 그레고리오 신부
언젠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은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앙인”이셨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 살았던,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게 될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믿는 종교인데, 성모님은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고 믿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28-38)
그리고 십자가 신비 앞에서 쉽게 예수님을 배반한 다른 여느 제자와 달리 성모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운명”(우리는 이 운명을 ‘성소(聖召)’ 라고 부릅니다)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나, 십자가 바로 서실 때까지, 그리고 부활 후 교회 공동체가 “정식출범”할 때까지 충실히 사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예수님을 닮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성소”인데, 성모님은 그 성소를 제일 먼저 사셨고,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신 사람(들), 곧 “내 사랑의 너”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끝까지...
단순한 감정적인 승복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특별한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단순히 권력을 쫓아다니는 “철새 정치”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뚜렷한 신념과 소신이 아닌 기회주의적 처신으로는 가능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쫓아다녀서는,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딴 짓”을 해서는 끝내 가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일입니다.
실리가 시의를 포기하라 하고, 유혹이 생각을 흩어놓을 때, 사랑은 없고 무의미한 의무만 있어 보일 때, 우리는 이성에 도움을 청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사랑이나 결정이 아닌 “끝까지 가는 사랑”은 이성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전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할 때,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앙인”이신 성모님은 “첫 번째 그리스도교 철학자”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 앞에서 우리처럼 “몹시 놀라셨는데”(루카 1,29 : 사람들은 철학의 근원이 바로 놀라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면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루카 1,29) 그리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경험에서 출발하는 “합리적 토론”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성이 신앙 진리 앞에서 승복하는 법도 바로 그런 합리적 사유를 통해 배우셨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첫 번째 사람”이 걸어간 길이 뒤따라오는 사람의 길을 미리 보여준다는 삶의 경험을 대입하며, “진지하게 믿는 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곰곰이 생각하는 일”을 비껴가거나 생략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 철학자”이기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5월입니다. 화가가 되어 마음의 붓을 듭니다. 그리고 신앙 진리 앞에서 “곰곰이 사유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맑은 하늘 위에 그려 봅니다. 성모님께서 입고 계실 옷 빛깔은 무엇일지, 순수한 사유의 색깔은 어떤 것일지 고민도 해 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한 알의 밀씨-에서 발췌
(교리신학원 소식지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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