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은빛 부서지는 아름다움(Fr. 유시찬)

Sr.Julia 2008. 4. 9. 16:31

은빛 부서지는 아름다움

Fr. 유시찬 (SJ)

 

올바로 깨어 잘살고 싶다, 기도 잘하고 싶다, 영성을 심화하고 싶다는 신자들은 많으나, 막상 칼을 들이대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다는 거지 뭐 그렇게까지...“ 라고 하면서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우리들의 참 모습이다. 귀만 즐겁게 하고 도루묵이 되니 좌절감만 생기고,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의 영성수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던 2000년 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쓴 소린 안 좋아 하고 깊은 영성,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의욕 없이 다만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 플러스 알파, 미사나 고백성사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원할 뿐이라면 외부 사람들은 우리를 욕심꾸러기로 볼 것이다.

신자 수도 많아졌고 사제나 수도자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가? 경제적 수준은 향상되었지만 새벽이면 방마다 연탄을 갈던 시절, 그 따뜻한 기운이 감돌던 행복감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살아 온 날보다 남은 삶이 짧은 우리들이 존재의 모습을 바꿀 때가 왔다. 색다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하는 삶에 소홀하고 미숙할 뿐 아니라, 옳고 그름, 좋고 나쁨,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를 판단하고 이를 의지력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은 했으나 변화된 모습은 너무 약하다. 좀더 성숙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미흡한 점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난시 현상이 심하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교정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이나 그밖에 구걸하는 이들을 보면 마음의 갈등이 생긴다. 그런데 어는 날, 모두가 富者라 자가용만 타고 다녀 지하철 안에는 상인들도 없고 전철 타는 이, 구걸하는 이들도 없는 텅 빈 지하에 나 혼자 뚜벅뚜벅 소리 내어 걸어가고, 저만치 멀리에 구걸하는 노인 하나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과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좋은 것일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할 때 하느님이 꿈꾸시던 하느님의 나라가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마음이 편해지게 되었다.

젊고 예쁘고 건강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을 꿈꾸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라라면 나이 먹은 사람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늘씬한 몸매의 상징인 가수 이효리는 우리에게 감사해야 하며, 우리도 그녀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없다.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이 있으므로 해서 빛나게 되는 것이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만들어 주시고 보시기 좋았다고 말씀하시었으니 참으로 감사하지 아니한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공경이 자리 잡게 된다면 그것이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니 될 것이다.

일등과 꼴등을 갈라놓고, 약자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그리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을 끊임없이 선호하는 논리 안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추한 것이 붙어 있을 때 예쁘고, 모르는 것이 죽으면 아는 것도 죽는 것이다. 또 있다는 것이 중심이 되어 생각하고 움직이지만, 아무리 좋은 골동품이나 그림, 가구일지라라도 그것들로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되면 창고가 되고 만다. 서로간의 빈 공간, 거리가 있어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있다(有)는 것이 근원이 아니라 없다(無, 空)는 것이 훨씬 더 근원적이다. 밤하늘이 별들로 꽉 차 있다면 무슨 신비감이 있겠는가? 깜깜한 어둠의 신비 속에 생명의 근원자리인 별과 달을 걸어 놓아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삶과 죽음, 앎과 모름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은 모르는 그것이 자극이 되어 앎이 탄생되었다. 앎의 근원이 모름이므로, 모르고 있는 그 사람의 상태를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대접해야 제대로 된 것이다.

 

영적 진보가 더딘 까닭

젊음과 늙음은 상대적인 것이고, 능력의 유무, 잘나고 못나고를 따지는 것 또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어느 한 면만 보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이기에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쪼개고 나누어 우열(優劣)을 매기면서 우수한 것은 취하고 열등한 것은 버리려는 논리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철이 났다고 해도 우리는 이러한 세상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문회 소식란에는 한자리 하는 사람만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신앙 안에서도 세상논리가 적용되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이분되어 오염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느님(창조주)↔인간(피조물), 인간↔자연, 善↔惡, 몸↔정신, 男↔女로 분리시키는 이 논리로 살아가면 망한다. 태극 문양에는 양(陽) 안에 음(陰)이 동그란 작은 원의 모습으로 들어 있고, 陰 안에도 역시 陽이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음 양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두 면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100% 음(陰) 100%의 양(陽)은 없다. 우리의 사고, 생각을 바꾸자. 근본적 사고를 바꾸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진보가 더딘 것이다.

 

원죄

하느님께서는 혼돈에서 빛과 어두움을, 그리고 물과 뭍, 자연과 인간,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이처럼 정 반대되는 둘을 조화시켜 생명을 탄생시켜 주셨으며, 같이 가야 더 깊은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 원리이다. 원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거나 더 나아지려고 하는 교만의 차원에서 범한 것으로 알아들을 것이 아니다. 둘이 결합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즉 존재의 구성원리를 깨는 것, 이를 거역하는 것, 그리고 저항하는 것이 원죄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끊임없는 생각과 영적 체험을 토해놓은 것이다. 성경은 모두 남자가 썼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시각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고 쫓겨나는데, 善과 惡, 이 둘은 반드시 붙어 있는 하나다. 선을 당기면 악이 따라 들어온다. 원죄에는 남자의 편견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에서 아담이 먼저 유혹을 받았으면서도 여성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남성은 조직, 질서, 합리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교, 우열, 그리고 지배를 중시하는 수직적 성향의 움직임이 있는 반면, 여성은 관계 맺는 것, 함께 가는 것을 중시하면서 위아래를 따지지 않기에, 하와는 선악을 따지고 위계질서를 따지는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원죄에는 남성성이 깊이 관여되어 있는데, 원죄라 하지 말고 신비로 남겨 두고 차라리 도(道) 또는 공(空)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단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으니까 이를 원죄라 개념 정리 해 놓은 것이 한계점이다.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면서 겉과 속을 구분해 만들어 내셨다. 여성은 껍데기는 여성이지만 알맹이는 남성성이, 그리고 남성에게 있어서도 겉은 남성이지만 그 안에는 여성성이 존재한다. 남성에게서 여성성을 보고 여성에게서 남성성을 보아라. 반대되는 상징적인 개념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걸어야 할 모습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 손을 대고 공개석상에서 여인에게 질문을 하는 등 스캔들을 불러일으키셨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서슴없이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 하셨다. 교회 내에서 여성성이 깊게 보완되어야 하며, 이는 교회와 인류의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

차별, 시기와 질투는 죄의 뿌리이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양의 맏배를 잡아 바쳤는데, 왜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바치는 예물을 즐겨 받지 않으셨을까? 여기서 땅은 어머니, 여자, 모성의 상징적인 개념이고, 동물을 바치는 것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비교 평가를 즐겨하는 남성성의 우월한 입장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남성성을 강조한 것이고, 원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성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미움이 있어야 사랑의 기운이 자라며, 미움이 사그라지면 사랑의 힘도 작아진다. 미움의 기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사랑을 키운다. 부부싸움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면 그것은 미움을 방치한 것이 된다. 은빛늑대가 순록을 잡아먹어 늑대를 없애고 보니 순록도 같이 감소하더라는 카나다의 경우와, 수족관의 물고기보다 바다 속의 물고기가 생명력이 넘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예수님의 관심사

예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합되어 있다. 설거지도 하셨을 터이고 생선을 구워 드시기도 했으며, 헌 부대에 새 천을 대고 깁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듯 늘 여인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셨던 분이다. 우리 안에도 남성성과 여성성이 잘 혼합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세뇌되어 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아주 가볍게 수월한 이야기만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강한 요구를 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하셨다면 다 떠나고 말았을 터인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의 기도” 한번 바치는데 30초쯤 걸리는 염경기도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아버지’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묵상기도로 발전하여 위로와 힘을 받게 되고, 마침내 내 안에서 우주가 펼쳐지는 듯한 깊은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기를 바라시며 이것이 그분의 관심사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해 주셨듯이 말이다. 둘 셋이 모여도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겠다고 하신 주님께서는, 마음 맞는 몇 사람의 작은 모임이 서서히 커가는 모습을 기대하시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정지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꾸짖는 분이시다. 구유에 뉘인 아기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시다. 늘 완전한 상태에서 더 완전한 상태로 끊임없이 나아가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만일 내가 당장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는 어디에 가 있을까? 연옥? 아니면 지옥? 아니다! 이것은 난시 현상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하느님께서는 “욕봤다” 하시며 좋아하실 것이다.

 

나는 완전할까?

무얼 보고 완전하다고 하는가? 좋은 것을 극대화 시켜 하나로 모은 것을 완전하다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善으로만 가득 찬 사람을 원치 않으시고 선과 악을 같이 가진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선으로 가득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모습, 완전한 존재이다. 선과 악을 묶어 100%를 이루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구걸하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팔자가 늘어졌다 하겠지만, 그 사람이나 나나 각자의 배역을 맡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드라마가 끝나면 주역이든 조역이든 모든 스탭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함께하면서 고생했다고 서로를 다독여주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영적 차원에 있어서도 이처럼 하나의 장엄한 드라마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균형이 깨져 불완전해 지고, 그 한사람이 들어갔을 때 완전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퍼즐이 하나라도 빠지면 불완전하게 보인다. 드라마를 멋지게 만들기 위해 옆 사람과 퍼즐처럼 함께 어우러져 완전하게 되고, 완전한 걸 알았으면 더 멋있는 드라마로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일류 배우는 어떤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잘 소화해 내지 않는가?

 

내가 부모를 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성모님의 영적체험”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체험, 내가 살아온 문화적인 배경을 통해 영적 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생물학적인 수태과정에 앞서 성령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우리 모두는 태몽이라는 것으로 계시되었다. 신비롭고 거룩하게 알아들으면서 영의 존재로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있다.

한쪽으로는 죄를 짓고 한쪽으로는 완전으로 나아가려는 양면이 같이 있을 때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시면서 그 모든 것을 영적 차원으로 심화시키셨듯이,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영적으로 재해석해 내고 심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