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사람이 ‘그분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셔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존재가 빠져 있다면 그분은 사람이 그분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즉 하느님은 그분에 대한 개념 안에 존재가 속해 있기 때문에 존재하셔야 한다.
안셀무스가 제시하는 삼단 논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전적으로 최고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 사람의 생각 안에 있다’. 인식되었음, 생각되었음이라는 말은 인식과 생각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생각 안에만 있을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객관적인 실재 현실 안에도 실존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 즉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은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연적 존재자이다. 존재하는 것은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 존재라는 것도 함께 제시한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조차 될 수 없는 어떤 것’ 즉 필연적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 이란 더 이상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참으로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처럼 안셀무스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실제 실존뿐만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 실존까지 증명하였다.
따라서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실재는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안셀무스는 필연적 존재는 오직 하느님만이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안셀무스 증명에 대한 비판**
토마스는 인간정신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3가지 견해로 대답하면서 세 번째 견해로 안셀무스의 증명을 말한다.
토마스는 안셀무스가 "하느님의 존재가 어느 누구도 내적으로는 하느님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알려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론을 말한다.
“그 자체로 알려져 있다. 자명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즉 하나는 그 자체로서는 자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명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로서 자명하고 우리에게도 자명한 것이 있다.
이 구별로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논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하느님 개념 안에 존재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실제로 그 자체로 알려져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명제의 주어, 곧 하느님의 본질을 알고 있지 않는 한 우리에게 이 명제는 그 자체로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토마스는 안셀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본질을 직접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저는 이 세상 사람의 평범한 정신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 평범한 정신상태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며, 두 가지 방법, 신앙과 추론적 사고(경험을 통한 귀납적 방법)로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2.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5가지의 길을 통해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1) 첫 번째 길은 운동변화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 인해서 움직인다. 현실태에 있는 움직여 주는 것이 가능태에 있는 어떤 것을 움직인다. 즉 움직여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존재자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고, 움직이게 하는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이렇게 계속 그 운동을 소급해 가면 어떤 첫 번째 움직여 주는 자, 다른 어떤 것한테서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제1동자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2) 두 번째 길은 능동인의 이유이다.
이 감각계에 능동인들의 질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능동인(자기가 자신을 만들지 않는다)으로 발견되지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모든 질서 지어진 능동인의 계열에서 첫 번째 것은 중간 것의 원인이고, 중간 것은 최종 것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도 제거된다. 그러므로 만일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 첫 번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종의 것도, 중간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결과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원인이 있는 것이고, 이 원인은 또 다른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다. 이렇게 계속 소급해 가면 제1의 능동인에게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제1능동인을 인정해야 하며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3) 세 번째 길은 가능과 필연에 의한 길이다.
사물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 즉 우연적 존재자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생성, 소멸하며 따라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존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어떤 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때에는 사물계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라면 지금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없는 것은 있는 어떤 것에 의하지 않고는 존재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뿐일 수가 없고 사물계에는 어떤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필연적인 것은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데서 갖거나 혹은 갖지 않는다. 이 필연성의 원인이 다른데에 갖는 필연적인 것들을 계속 소급해가면,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서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필연성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 필연적 존재자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4) 네 번째 길은 사물계에서 발견되는 계층, 즉 선성과 완전성의 정도에 의한 길이다.
사물계에는 진, 선, 미에 있어서 더하고 덜한 사물들이 발견된다. 더하고 덜하다고 하는 것은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접근하는 데 따라 말해지는 것이다. 존재에 있어서도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고귀한 것, 따라서 최고도의 유인 어떤 것이 있다. 어떤 영역에 있어서 최고도의 것으로 불리는 것은 그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의 경우이든 그 존재와 선성과 완전성의 원인이 어떤 것이 있으며, 이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5) 다섯 번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 취해진다. (합목적성)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즉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자연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을 목적에로 질서지어 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가 있다. 이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3. 벨테의 신 존재 증명
<신에게로 향한 첫 번째 노정의 구상>
먼저 신의 존재를 경험으로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증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 신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하이데거에 의하면 과학적 증명으로 제시할 수 있는 신이라는 그것은 어떤 신적인 신도 아니다.
신에 대한 전제가 없이 출발한다. 전제된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반박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앞으로 제시하는 부정할 수 없는 세 가지 기본사실은 강제적이지 않으며, 어떤 상태 또는 관점과 무관한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세 가지 사실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1) 부인 할 수 없는 첫 번째 것은 ‘우리는 타인, 사회, 세계 안에서 현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확신에 있건 무관하게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내가 현존재 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2) 두 번째 사실은 ‘우리는 언제나 현존재 했던 것이 아니며, 언제나 현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비현존재, 무가 묻어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언제인가 현존재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언제인가 더 이상 현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어떤 것도 비현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의 경험 : 비현존재의 경험, 무의 경험에 대해 보면, 순수 형식적으로 고찰할 때 무는 현존재의 부정이다. 관계적 표현으로서 무는 현존재의 부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는 현존재의 타자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것은 하나의 경험이 된다. 예를 들어 밤에 큰 홀에 혼자 들어갔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때 ‘없음’이 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없음’, '무‘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없음이 단지 없음이라면 나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경험되기 때문에 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무가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지지 않았다면 무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무가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무는 단순히 형식적인 부정적 특성(단순히 현존재하지 않음, 현존재의 반대라는 부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인 특성으로 경험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는 보여줄 수 있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를 경험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의 모호성 : 무는 긍정적인 실재이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볼 수 없으므로 모호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무를 단순히 공허한 것, 허무로서 이해할 수 있고 또는 어떤 것이 있지만 경험되지 않는 것으로 있으면서 완전히 자신을 숨기고 있어서 무로서 경험되고 있는 절대적인 숨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무는 완전한 허무인지 또는 절대적 숨김인지 미해결로 남겨두는 모호성을 갖는다.
*무의 억압하는 것 : 무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뒤로 감춘다. 무를 일부러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감추고 물러선다. 우리는 삶의 분주함속으로 들어가 무로부터 도피한다. 긍정적인 실재만 볼 뿐 무는 볼 수 없다. 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더 이상 현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주시하고, 지적인 정직성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무의 끝없음과 무조건성 : 무는 끝이 없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끝이 없다. 또한 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불가피성을 갖으며 무조건적이다.
*무는 아무런 사물도 또는 주체도 아니다. : 무는 모든 것의 부정이다.
*현존재의 타자로서의 무 : 무는 현존재의 타자이다.
3) 세 번째 사실은 현존재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의미를 전제하고, 의미가 있기를 요청한다. 인간은 우리 삶이 허무하지 않기를,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현존재가 있는 곳, 삶이 있는 곳에는 끊임없이 의무를 추구한다. 만약 무가 없다면 의미를 추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의미를 물음은 우리 삶을 정당화시키고 성취시킬 수 있는 의미를 묻는 것이다. 이 의미물음은 추상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존재에 대한 생동적인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삶에 있어 전반적으로 의미를 고려하고, 의미에 대한 당연한 요청은 인간 현존재의 토대와 뿌리 안에 존재한다. 또한 이것은 강제적이지 않다. 의미를 고려하고 의미를 요청하는 삶에게는 그 진리를 인식하게 되고 그것은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4) 귀결
현존재, 무(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의미요청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3가지 전제를 볼 때, 우리의 현존재가 허무한 것으로서 한없는 무에 의해 삼켜버리게 된다면,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없음을 단순히 허무한 무로 이해한다면 무는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의미를 요청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부인하게 된다. 우리 삶이 무의미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허무 속으로 사라진다면 잠시 동안의 의미 있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허무한 무일뿐이라면 모든 의미요청을 파괴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 위 그리고 선과 악...의 차이 앞에서 의미를 포기할 수 없다. 현존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양자택일 앞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무는 허무일 뿐인 무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의미 있는 인간 현존재란 무가 무한하고 무조건적이며, 일체의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간직하는 힘의 숨겨진 현전일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는 신비한 방식,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의미를 보존하고 의미를 결정하는 무한하고 무조건적이며 일체의 것을 요구하는 신비스런 권세에 대한 신앙은 따라서 이성적으로 확증된 신앙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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