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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물(플라톤,아리스토, 데카르트,흄,칸트)요약정리

Sr.Julia 2007. 6. 11. 10:27
 

<플라톤>

* 플라토닉 러브 : 플라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은 그 자체로 에로스의 한 방식이며 본질상 사랑이다.

아름다움은 1)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며 생멸하거나 증감하는 것이 아니다. 2) 독립적으로 자존하면서 영원히 하나의 존재로 있다. 3)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확실한 방법으로 이 아름다움에 참여한다.

사랑의 진리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아름다운은 육체에서 두 아름다운 육체로, 두 아름다운 육체는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아름다운 육체는 아름다운 일과 활동으로, 아름다운 활동은 아름다운 학문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에는 그 아름다움 자체만을 학문으로 나아가 마침내 아름다움의 완성체를 알수 있게 된다.

플라토닉 러브(사랑)은 육체의 아름다움, 영혼, 품행, 인식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자체를 얻으려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플라토닉 러브는 이데아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 이데아 사상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투신한 플라톤은 도시국가의 멸망과 당시 정치상황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마침 소크라테스의 죽음앞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 국가 존재가 붕괴되고, 최고의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다면 국가의 존재는 그뿌리부터 잘못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정의에 본질에 대해서 묻게 된다.

플라톤은 정의는 무엇이며 선한 것, 옳은 것,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마침내 플라톤은 이런 생각들을 통해 인간은 정의가 무엇이며 또 그밖의 다른 덕들도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안에 모든 올바른 행동, 덕들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행동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전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전체 현실에 대해 인식할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자의 원형, 이데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원초적인 실체로서 이세상은(감각계) 이데아의 복제품, 그림자에 불과하다. 감각계의 세상은 이데아를 열망하는 곳이고, 이 감각의 세계안에서는 사물들이 생성하고 변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지니지만 이데아에서는 어떤 변화도 없이 그대로 항상 존재한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인간은 탄생이전에 이데아에서 원형들을 경험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이 감옥과 같은 육체에 갇혀 있게 되었다. 영혼이 현실의 세계에서 어떤 사물을 인식하게 될 때 영혼은 눈앞에 있는 그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통해서 그 사물 자체, 이데아의 세상에서 본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그가 근원적으로 본 적이 있는 그 원형을 그리워하며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있었던 그 근원(이데아)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이 열망 때문에 감성적인 욕망에서 해방되어 이 지상의 사물을 바라보면서 이데아를 관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철학은 바로 인간이 이 지상생활에서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이데아로 향하는 에로스의 가장 완전한 완성으로 본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동굴의 비유

사람들이 땅속의 동굴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동굴안의 벽을 향해 손과 발, 목까지 묶여 있어 움직일수 없이 벽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다. 그들 뒤쪽으로 동굴 밖에서는 멀리 태양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태양사이에는 높은 담이 있는 길이 있다. 이 길로 여러 사람들과 물건들, 동물들이 지나가고 있다. 동굴안의 사람들은 동굴안의 벽에 비치는 사물들, 동물들, 사람들의 그림자를 볼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그림자가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굴안에 묶여 있던 사람중 한사람이 풀려나서 동굴밖으로 나갔다. 처음 그는 햇살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차차 사물들, 동물들,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나는 태양까지 보게 되었다. 그는 기뻐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는 점차로 동굴안에서 묶여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다시 동굴로 내려간다. 그리고 동굴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주고 그들을 그 동굴 밖으로 데려 내오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일 것이다.


이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안의 세상은 현실의 세계(감각계)이고, 동굴밖의 세상은 이데아의 세상이다. 이데아의 세상은 참된 세상이며, 현실의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 매달려서는 안되며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궁정 의사였고 부유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8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이 죽기까지 20년 동안 그의 제자로서 배운다. 플라톤의 죽음 후 독자적인 학문을 하면서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걸어 다니면서 철학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들을 소요학파라고 불렀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사상 면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은 그 사물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실재, 다양한 실재의 형상에 관심을 두었고 사물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면서 결국 모든 실재가 바탕을 두고 있는 그것에 대해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었다. 동물들과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과 별, 지구로까지 탐구의 영역이 넓었다. 그러면서 유기체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하는데 유기체는 하나의 독특한 전체로서 그것이 하나의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고 이끌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런 목적과 목표는 유기체 밖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현실태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현실태는 모든 생물은 자기 안에 추구해야 할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충족시켜 실현하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은 자기실현과 자기완성이라는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근원적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한다. 인간은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숙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인지 묻게 되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하게 되는 것을 로고스 즉 정신, 이성을 말하게 된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로고스가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이 로고스의 탐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순수가능태로써, 단순히 있기만 하는 것이다. 살아있지 않은 물질이다.

둘째는 질료와 형상을 지닌 실체(존재하는 것)은 가능태와 현실태로 되어 있는데 생물, 인간 등이 여기 해당한다.

셋째는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부족이나 결핍이 없는 상태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부동의 운동자인 순수 현실태이다.

둘째 단계에서 가능태와 현실태로 되어있음은 ‘변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변화는 가능한 것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있던 것’이 ‘저렇게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씨가 있다. 그 사과씨는 사과씨로 있는 그 자체로는 현실태이지만, 사과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가능태)을 가지고 있다. 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 과정이며, 자기아에 내제된 가능성을 최대한 충족시켜 실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변화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은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해서 변화한다. 그런데 이 다른 것은 또한 또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소급해가보면 첫 번째 것이 있어야 한다.그 첫 번째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 스스로는 다른 것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그것이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 부동의 운동자, 순수현실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인 것과 가장 완전한 것은 신이다.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자신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17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며 사상가이고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데카르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면서 스콜라 학문을 배웠지만 정작 그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과학과 철학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1619년 마르티노 축일 전날 군대 막사에서 깊은 통찰과 3가지의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이 통찰과 꿈은 그의 앞으로의 철학적인 방향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라는 책을 철저하게 탐구한뒤 방향을 돌려 탐구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삼았다.


* 의심하는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가하학적 방법으로 철학함으로써 확실함과 명증의 철학을 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수학적인 공식처럼 확실하고 명백하며 그래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줄 한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철학함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제기하여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일단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고 첫 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 철저한 회의를 하게 된다. 먼저 외부 세계와 자연세계에 대한 의심을 한다. 과연 사물이 인간에게 나타나듯이 실제 존재하는 것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또 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감각이 얼마나 우리를 잘 속이고 있는지를 종종 체험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만약 육신은 없는 것이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2+2=4라는 수학적인 명제와 보편적인 진리 또한 의심하게 될 때 확실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인식의 기초가 되는 모든 진리가 철저하게 의심을 하자 확실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닌 거짓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신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왜곡된 세상 속에 창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기만적인 신, 악의가 가득 찬 악마일 것이다.

 이렇게 마저 나를 속이고 있는, 모든 확실성이 무너진 거기에서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났다. 그것은 의심을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데 그 의심이 바로 나의 현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즉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나오게 되었다. 모든 의심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의심하고 있는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하다고 하는 것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근대 철학의 특징이다.


* 신 존재 증명

인간은 자기 내면에서 최고의 완전한 존재, 이데아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어디서 받은 것인가? 왜냐하면 인간은 이 이데아를 자신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고로 완전한 존재가 인간의 마음속에 이데아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인간을 근본적인 오류, 거짓 속에 버려둘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사기꾼이 될 수 없고 순수진리여야 한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순환논증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최고로 완전한 이데아를 자신 안으로부터 만들 수 없음을 말하는데 그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이데아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인은 결과보다 작을 수 없다. 같거나 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런 주장은 스스로 자명한 진리로 증명할 길이 없다.  



<흄>

흄은 회의론자이다.

흄의 회의는 형이상학과 초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사변으로 향한다.

그에게 형이상학적 이념은 인간 지성이 결코 접근할수 없는 대상을 파고들려는 인간 허영심의 노력의 산물로 보며, 이런 철학은 그 정체가 폭로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간 지식에는 2가지만 있을 뿐이다.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학문인 수학과 기하학으로 이런 것은 증명과 확인 실험으로 제대로 된 지식이다. 또 사실, 존재에 대한 학문으로 자연과학이 있다.

이 2가지 외에 다른 학문들 즉 윤리, 형이상학, 종교, 신학 등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이며 억견일뿐이다.

흄은 형이상학을 반대하고 철저한 경험주의를 주장한다.

우리의 이성은 경험의 도움없이는 현실적인 실재와 사실에 관해 어떤 추론도 할수 없다.

지성과 이성은 그 자체로 어떤 진리도 파악할수 없고 오직 감각적인 인상들 만이 남으며 이 인상이 지식의 궁극적 원리이다. 관념은 인상을 복제한 것 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경험된 각각의 ‘사람’은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말하는, 사전에서 정의내리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있을수 없다. 각각의 개별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통칭적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흄의 약점이다. ‘비슷함’은 보편적 진리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개별자가 있음은 보편자가 있는 것이다.

인상, 지각만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은 사물은 지각의 다발, 감각의 다발이라는 것이며, ‘나’ 역시 지각과 감각의 다발이고, 따라서 실체는 없고 우유만 있을 뿐이다.



<칸트>

칸트는 꼼꼼함과 정확성의 천재였다.

그의 하루 일과는 엄격하게 짜여 있었고 그의 주변 환경역시 매우 정확히 정리정돈되어야 했다.

칸트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실재와 이 실재의 배후에서 본래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즉 모든 제약적인 것 안에 또는 저편에 있는 무제약적인 것을 묻는 것이다.

칸트의 사상은 형이상학을 향하고 있다.

즉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서서 실재의 최초이자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3가지 관점에서 말한다.

인간에 있어서 무제약적인 것, 세상에 대해 무제약적인 것, 단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에 대해 묻는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유한한 존재를 훨씬 능가하는, 죽음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며, 세계에 대한 물음은 자유에 대한 물음으로, 단적인 것에 대한 물음은 신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신, 자유, 불사불멸을 형이상학적 사유의 피할수 없는 과제라고 말한다.

칸트는 여기서 확실성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무엇이 이유인지 묻게 된다.

이것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한 물음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확실한 답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은 이성으로 인해서임을 발견한다.

인간이성은 눈에 보이는 실재의 배후로 돌아가 그 근거를 들여다 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성이 끊임없이 실체를 추구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성은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월하려고 한다.

따라서 칸트는 이성을 법정에 세워놓고 비판한다.

이성의 독단인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이성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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