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및 묵시록>
교리교육학과 2년 박정아 율리아
1. 요한 1,35-51 가운데 두 구절을 선택하여 해설.
1) 요한 1,35-51(첫 제자들,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의 구성
요한1,35-51은 네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장면은 35-39절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당신의 첫 제자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에 관해서 증언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두 명의 제자가 예수를 따르게 된다. 이로써 증인으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완수된다. 예수는 자기에게 다가온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반응을 보이고 그들과 대화하신다. 그들도 예수와 함께 시간을 갖고자 하며, 예수는 그들을 초대한다. 이 초대는 단순한 초대가 아니며 예수와 함께 친교를 나누도록 부름 받음이다.
둘째 장면은 40-42절로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예수께 데려가는 장면이다.
안드레아는 그의 형 시몬에게 힘찬 증언으로 예수를 알리고, 예수는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면서 신적인 지식을 갖춘 계시자로서의 정체를 드러낸다.
셋째 장면은 43-46절로 예수는 직접 필립보를 만나 그를 제자로서 부르신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이 제자는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를 증언하며 초대한다.
넷째 장면은 47-51절로 나타나엘은 와서 보라는 필립보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예수는 자기 계시와 약속을 말씀하신다.
2) 선택한 구절들의 앞 뒤 맥락(context)
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1,39)
이 구절은 세례자 요한이 1,29-34절에서 자신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고백과 1,35-36절에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다시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소개한 후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함께 묵게 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와의 ‘함께 묵음’은 제자됨의 첫 번째 자세이며, 제자로서의 앞으로의 여정을 드러낸다. 스승이신 분과의 묵음은 스승을 전하는 자세와 바로 연결이 된다. 필립보도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인도할 때 그 역시 ‘와서 보시오’라는 말로써 예수의 제자 됨으로 이끈다.
②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1,42)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께로 인도된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께로 인도한다. 부르심에 대한 신앙의 응답은 바로 주위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다음날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똑같은 모양으로 예수께 인도 할 것이다.
3) 선택한 구절들의 주요 어휘, 어구의 해설
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1,39)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의 초대 말로써 이제 두 제자는 직접 예수 자신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특히 “보시오.”라는 말은 예수가 나타나엘(50절)이나 제자들에게 말한 것(51절)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어떤 하나의 약속을 시사하기도 한다.
“보는 것”은 ‘아는 것’ (14,9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에 해당한다.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38절에서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반문에 내포된 그들의 원의가 이제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묘사한 내용이다. 따라서 그들의 원의는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즉 예수와 함께 머물면서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배우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자 했을 것이다.
②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1,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감으로써 자신이 입으로 고백한 내용(41절)을 실천에 옮기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눈여겨보며” 예수가 시몬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예수는 개인적으로 시몬에게 무엇인가를 알리고자 한다는 것을 뜻한다. 눈여겨본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향했던 것(36절)과 동일한 이해의 눈길이다. 예수는 곧 베드로의 성격과 운명을 안다.
“요한의 아들 시몬” 여러 사본들과 교부들은 마태오복음 16,17(시몬 바르요나)에 동화되어 ‘요나’ 라고 읽는다. 아버지의 이름은 21장 15-17에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독법은 마태오 복음 16,17을 제외하면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미래형으로 된 것은 시몬이 지금부터는 케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요한에 의하면 베드로의 새 이름은 예수와 그가 첫 번째로 만나는 이 순간부터 주어졌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 이름은 3,16에서 열두제자들을 선택할 때 제일 처음 나온다. 마태오 복음 16,18은 베드로가 메시아고백을 함으로써 이름을 붙여주는데 훌륭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요한은 ‘케파’라는 이름이 베드로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어느 이름에 대해서도 해석을 하지 않는다. 즉 마태오에 나오는 해석(교회의 주춧돌인 베드로)이나 또 일반적으로 여기서 받아들여진 해석(베드로의 성격에 예기되는 변화)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마도 요한은 계속되는 베드로의 생애가 어떠한 해석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복음사가는 시몬에게 케파라는 이름을 알려주는 예수의 인격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시몬을 눈여겨 본 예수는 먼저 그의 신원(요한의 아들)을 밝혀내고 앞으로 불리게 될 이름(케파)까지 알림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즉 신적인 지식을 갖춘 계시자로서의 모습이다. 이런 예수의 모습은 안드레아가 고백한 ‘메시아’, 곧 유다인들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분으로서 계시된 것이다.
예수는 신비롭게도 당신께 오는 이들을 다 아신다.(1,48;2,25;4,16-19)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심은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심을 뜻한다.
4) 오늘의 신앙인들을 위한 의미 (짧은 묵상)
① 와서 보아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설명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 곁으로 다가감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분이 계시는 곳을 가기 위해서는 내가 편안해 하는 곳, 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떠나야 하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나의 자리에서 떠난 다음, 그분이 계시는 곳, 그분의 손이 닿는 것들, 그분이 만나는 사람들, 그분의 발길이 머무는 곳을 곁에 함께 있으면서 직접 보아야 한다.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이를 통해서는 볼 수 없다.
또한 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다. 겉으로 보기에 부요함이 가난한 것보다 더 축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은 그 가난에 담긴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잘 보고 경청할 수 있는 마음의 개방 역시 제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와서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서는 누구도 제외 된 사람이 없으며 모두를 초대하신다. 그분에게 가까이 갈수 있는 이들이 한정된 몇몇의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그분의 제자로서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을 먼저 부르고 계신다. 그분의 곁에 있던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충직했던 어부 제자들,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와 창녀, 죄 많은 이들, 사회에서 배척받은 나병환자들, 이방인들까지... 이처럼 당신 곁에 오고자 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를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역시 누구에게든 그 사람의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음을 느끼도록, 누구든 내게 올 때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예수님의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② 함께 가서 보고 함께 묵었다. / 데려가다
‘함께’ 는 우리의 공동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각각의 인격체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또한 공동체로서, 교회의 한 지체로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주님께로 가는 길에 우열이나 경쟁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자매이며, 형제이다.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고, 도움을 주면서 함께 우리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함께’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이 길에서 주위에 있는 이들의 모습도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걷는 이들과 보조를 맞추고, 그들의 의견에 내 의견을 조율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내 것만 고집해서는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역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함께함의 중심에 언제나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함께 함은 또 다른 이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리가 된다. 나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느끼지 못할 나눔과 초대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함께 할수록’ 다른 이들을 그 자리에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③ 눈여겨보다.
예수님의 눈여겨보심은 그 사람의 내면 깊이를, 그 사람의 존재를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에 편견을 갖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존재에 담겨 있는 가능성, 하느님께서 고유하게 뿌려주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씨앗을 보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자유인이셨고, 당당하셨고, 거리가 없으셨다.
그러나 이 시선은 단죄나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눈여겨보신다. 당신의 길을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 한없는 사랑의 시선으로, 생명을 살도록 용기를 주시는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
④ 새로운 이름 : 그리스도교인
성서 안에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맡기는 특별한 사명을 가리킨다. 시몬이 예수님께 새롭게 받은 이름은 케파라는 이름은 교회의 튼튼한 기반이 될 베드로의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르면서 새 이름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 이름은 내가 가진 어느 이름, 직함, 직위보다 더 근원적인 이름이다.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단체회장... 인간 사회가 주는 어느 이름보다 나의 존재를 명확하게 해주는 말이며, 소명이 담긴 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얼마나 감사하며, 자랑스러워하는지 또 그 이름에 맞갖도록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간디가 말했던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다.’ 는 말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 이름에 맞게 살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자녀들인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산과 같은 이름이며, 우리는 세례로서 받게 된 이 새로운 이름에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살아야하는 사랑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요한 4,1-42 가운데 두 구절을 선택하여 해설.
1) 요한 4,1-42의 구성
4장은 크게 네 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면은 4,1-6으로 배경을 설정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시며 갈릴래아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계신다.
둘째 장면은 4,7-26으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7-15 :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사이에 ‘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화가 나온다.
16-19 : 사마리아 여인의 개인적인 상황인 ‘남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화이다. 남편은 6번 나온다.
20-26 : ‘경배와 의식’ 즉 때에 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셋째 장면은 4,27-38로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인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24-30 : 제자들이 돌아와서 왜 그 여인과 대화하는가? 라고 놀라지만 직접적인 질문은 없다. 상황적으로 제자들이 도착하자 여인이 떠난다. 즉 고을로 갔던 제자들이 돌아오고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고을로 돌아간다.
31-34 : ‘양식’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이며,
35-38 : ‘추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화이다.
넷째 장면은 4.39-42로 결론부분이다. 예수와 여인의 말을 듣고 온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내용이 중심이다.
이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개체와 개체와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총체적 의미로서 예수가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종결되고 있다.
2) 선택한 구절들의 앞 뒤 맥락(context)
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4,14)
요한복음에서 물은 예수 안에서 구약이 완성되는 의미로 계속 사용된다. 물은 2장 6절에서는 제의적인 정결의 요소로, 3장 5절에서는 종교의식의 물질적인 요소로, 4장에서는 인간이 마시게 되는 생명의 물을 의미한다. 5장에서는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6장에서는 물위를 걸으시며, 초막절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다시 선포된다. 이 물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와 물을 쏟으시는(19,34)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게 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에서 처음에는 육적인 물을 청하면서 인간의 가장 낮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곳에서 출발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여인으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구신지에 대해 눈이 뜨도록 하며, 점점 대화의 차원을 바꾸어서 계시의 차원, 영적인 차원으로 여인을 이끌어 가신다.
②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4,18)
목마름에서 출발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여인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시면서 그녀의 가장 목마른 곳, 깊은 상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신다. 이 말씀으로 여인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고 계심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예언자로서 인정하게 된다.
3) 선택한 구절들의 주요 어휘, 어구의 해설
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4,14)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자기가 이미 계시하신 말(10절)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예수가 주고자 하는 선물 곧 생수에 대해서 설명한 계시 말씀이다. 이 생수는 갈증을 영원히 해소할 수 있고 사람 안에서 하나의 샘이 되며, 그 샘물은 영원한 생명에로 솟아나온다. 형상어로 표현된 예수의 이 계시말씀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자로 계시된 것이다. 갈증은 생명에 대한 열망으로서 인간 구원과 관련된 형상어이다. 둘째로 예수의 선물은 사람 안에 내재한 ‘생명’, ‘말씀’, ‘진리의 영’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사람 안에 내재한 ‘샘’은 지속적으로 ‘영원히’ 활력소의 역할을 한다. ‘물을 솟아나온다’는 말은 사람 안에 내재한 신적인 생명력에 대한 초자연적인 생명력, 곧 신선함이나 감도가 결코 감소되지 않는 생명력을 표현한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말은 문맥상 ‘영원히’ 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가 주는 선물은 영원히 머무는 생명의 활력소가 된다는 뜻이다.
“물” 사막과 광야에 가깝고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땅에서 물은 생명이 지니는 모든 가치의 상징으로 특히 지혜, 율법 또는 성령의 상징으로 쓰인다. 요한은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내려오심을 생각한다.
“마시면” ‘마시면’은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누가 마시든지’ 가 아니라 ‘누구든지 마신다면’으로 번역해야 한다. 생명의 물을 단 한번 마시는 것과 보통 물을 반드시 여러 번 마셔야 하는 상황이 대조된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번역된 “마시는 사람”은 아마도 집회서 24장 21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우물 혹은 샘은 사람 안에 있다. 여기서 대조는 외적인 명령들에서 나타나는 옛 율법과 예수가 성립시킨 새로운 내적인 율법 사이에 있을 수도 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19장 10절의 구원에 때에 대한 진술 ‘그들은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와 집회서 24장 21절 ‘나를 먹는 사람은 더 먹고 싶어지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마시고 싶어진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의미는 지혜를 한번 맛본 사람은 계속해서 지혜를 원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지혜보다 더 높은 단계의 주장을 한다. 그와 그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후로도 영원히 그것을 받게 될 것이며, 내적으로 그들의 요구가 충족될 것이다.
②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4,18)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깊은 내면의 삶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이끌어 주고자 한 것이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여자는 두 번, 많아야 세 번 혼인할 수 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 전체를 생각할 때에도, 이렇게 다섯 번이나 혼인하는 것은 도덕이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인에게는 죽거나 혹은 이혼한 합법적인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살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교적인 기준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인 사람과 살고 있다.
이 여인은 각기 자신들의 신을 가지고 있는 이방의 다섯 부족으로 형성된 사마리아를 대 표한다.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아닌 한 사람은 거짓 신을 가리키거나 혹은 참 하느님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거짓 예배를 가리킨다.
4) 오늘의 신앙인들을 위한 의미 (짧은 묵상)
① 주님께서 주시는 물 / 솟아나는 샘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는 저수통에 담겨 있는 물이 아니라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실제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주는 물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이 생명수의 특징을 설명해주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14)
물의 이미지는 피곤하고 지쳐있는 그래서 희망이 없는 듯한 영혼에게 생기를 주며, 생명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일상의 물의 의미를 넘어 우리의 온 존재를 생기 있게 하는 물은 바로 생명수인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치유하고 생기를 돋우어주는 영혼의 물이 되신다.
우리가 매일매일 예수라는 신적인 샘에서 그 물을 마신다면, 매일 말씀 안에서 예수라는 생명수를 만난다면 우리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온 이 물은 마르거나 샘솟기를 멈추는 샘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물을 솟아오르게 하는 신적인 샘이기 때문이다.
② 다섯 남편과 지금 사는 남자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산 남자는 모두 6명이다. 하지만 지금 사는 남자 역시 남편이 아닌 것을 보면 남편과의 관계에서 계속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볼 수 있다. 구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아내를 충실히 사랑하는 남편인 하느님과 그와 반대로 부정한 아내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마치도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남편 아닌 남자와 사는 모습은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며 부정한 상태로 있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여섯 남자와의 관계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여섯 남자는 부, 권력, 명성, 성공, 미모, 건강, 성...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여인에게서 지금의 우리 모습을 또한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내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게 하는 우상은 무엇인가?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삶 안에서 쉽게 이 우상들에게 빠진다. 하지만 여섯 명이나 되는 우상들을 볼 때, 그 어느 것도 여인의 마음을 온전히 채우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여인이 갈망하는 것 즉 ‘조건 없는 사랑, 진실한 사랑’을 채워준 우상은 결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모든 갈망,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여인은 마침내 7번째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갈증을 채우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그분의 진정한 사랑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존재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며, 내가 묶여 있던 그 많은 것들이 헛된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자신을 온전히 알고 또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 거부하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나 상황을 대면하기란 어려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나의 그 아픈 부분을 비추시는 빛을 느끼게 된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여러 남자와 함께 살았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사는 이 여인에게 남편이은 숨기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존재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 내면의 어두움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에 대해 분노하시면서 당신 뜻대로 들추어내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께로 오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며 그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 이 빛에 자신을 열 것인지 아니면 닫고 있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기서 여인이 자신의 처지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미화하려고 거짓을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기다리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억지로 그 여인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 여인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당신의 치유를 원하도록 때를 기다리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이는 그분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비춰보고 투명한 모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내면을 펼쳐놓고 어두움을 어둠이라고, 죄를 죄라고 고백하게 되며 바로 이 자리에서 치유의 은총이 이루어지게 된다.
3. 요한 13,1-17에 묘사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행위’와 그에 관한 말씀이 요한복음서 전체 안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기술.
요한복음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행동 전체는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1-12장에서는 사랑이 어떻게 투쟁하는지, 세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세상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세상에 하나의 심판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거부했고 그분의 활동은 위기, 심판, 분열, 결정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주는 행동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들려주시고, 수난과 부활을 통해 끝까지 가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완성하려고 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최고의 행동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 모범과 기초를 제공한다. “주님이요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3,14)
예수님의 사랑은 발을 씻어줌에서 구체화되고 제자들 사이에 같은 사랑으로 새겨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한다. 발 씻김과 사랑의 계명이 선포되는 13장은 앞으로 펼쳐질 13장 이하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발을 씻기시는 행동과 새 계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관계의 모델을 제공하신다. 관계를 맺고 사는 능력을 주신다. 관계의 원동력인 사랑은 12장에서 암시되어 오다가 13장에서 전면에 나타나 14장까지 이어지며 명시화된다. 여기서 사랑을 관계의 관점에서 풀어 가신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관계의 연속성이 특별히 강조되며 제자로서의 삶의 원천이 사랑임을 밝히고 있다. 15장에서 본격적으로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고, 16장에서는 성령과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17장은 이 전체를 마무리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하신다. 관계의 완성인 일치가 이 기도의 핵심이다.
전체적으로 13-19장은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단락들이다. 이 전체 대목에서 13장은 14-19장의 내용을 미리 예고하며 요한복음서의 뒷부분의 서문 역할을 하고 전체를 개괄하는 장이다.
13장 1-17절까지의 구조에 대해서 보면,
13,1-3 : 이야기의 틀을 제공한다. 시간(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과 공간(저녁만찬 자리) 을 잘 배열하면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소극적인 측면의 주인공인 사탄과 유다가 소개된다.
13,4-11 :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위와 그에 대한 해설적인 대화가 나온다.
13,12-17 :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13,1의 ‘파스카 축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는 발 씻기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난과 영광이라는 전체 이야기(13-20장)의 테두리 역할을 한다. 카나에서는 아직 다다르지 않았고(2,4) 초막절 축제 때에도 이르지 않았던(7,30;8,30) 예수님의 ‘때’는 이제 마지막 파스카 축제에 연결되어 드디어 시작되었다.(12,23-28)
이 ‘때’는 아버지께로 옮겨가시는 때이며 예수님은 이 때를 기다려 왔고 그 때문에 세상에 오셨고(12,27) 그 때가 왔음을 기꺼이 환호하셨다.(12,23.28)
예수님의 때는 수난과 부활로 영광에 가까이 간 시간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신다.(17,3)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3,16-17.12,47), 악의 어두움을 비추기 위하여(3,18;12,46) 세상에 파견되셨고, 파견의 임무를 완성하자 그분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16,28) 수난과 죽음을 통한 이 옮겨감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 사랑의 극치를 증거 하게 된다.
13,1에서 ‘아셨다’라는 예수님의 앎은 바로 중복되어 나오는 ‘사랑하다’는 동사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파견 전체를 사랑의 표징으로 요약한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당신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이끌린 사람들 즉 제자들, 착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10,3-4)을 가리킨다. 이 양떼는 예수께로부터 생명을 다하는 사랑을 받았다.(10,11.15) 그리고 이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19,30) 라고 하시며 완전에 이르는 최고의 증거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에서 ‘씻기다’는 단어가 강조된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안에서 13번 나오는데 여기에 8번 나온다.
음식을 들기 전에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은 손님을 환영하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이것은 비천하고 낮추인 행위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행동이 만찬 중간에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다. 만찬 중에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며 무엇인가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한 하나의 예시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와 발을 씻기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행동이 일치되어 나온다. 제자들의 발을 깨끗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그들을 죄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1,29;19,34)
13,7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13,36-38절에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연결이 된다. 그 때는 시간이 완성된 후에 성령의 빛으로 이해하는 때이고 시몬이 스승이신 주님의 길을 순교로 따르게 되는 시간(21,18-19)일 것이다.
이 말씀은 2,22과 12,16절에도 나오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성전 정화와 승리의 입성이 지닌 완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3,12절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4-5절에서의 행동과 대칭적으로 표현된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며 당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말씀하신다. 이 본(本)은 제자들 사이에 있어야 할 상호 봉사 관계의 표본이며 기본이다. ‘~한 것처럼’은 비교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근거를 표현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죽음-영광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 표본과 기본 위에서 제자들에게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하는 완전한 나눔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몸을 낮추어 발을 씻어주시는 겸손과 섬김의 행동은 이제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알고, 실천할 때 행복하다. 요한복음에서 ‘행복’은 오로지 알고 있는 진리를 그대로 행할 때 복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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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너라 (성서가족을 위한 요한 복음 해설서 1, 최안나, 성서와 함께, 1998
예수님의 사랑 (성서가족을 위한 요한 복음 해설서 2, 최안나, 성서와 함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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