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결혼』 (Marriage, A History), 스테파니 쿤츠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005.
교회전통에서 수도원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혈연보다 더 강한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수도 가족이라고 말한다. 남녀의 혼인서약처럼 수도자의 서원은 각각의 개별 수도자가 하느님과 맺는 사랑의 약속이며 이들 수도자들이 한데 모여 수도원 공동체 즉 수도 가족을 이룬다. 그렇게 보면 수도 가족 역시 특별한 가족 형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특별한 가족적 분위기에 있다 보니 가족의 변화가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가족과 가족관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졌다. 수도자로서의 삶과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관련 없이 보이지만 가족은 여전히 고향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에 관심과 애정이 기울게 된다.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주변의 지인들은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고 어른이 되기 위한 인생의 관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문을 지나가기를 거부할 경우 부정적 의미가 담긴 사회의 시선을 감당해야 될 거라고 했다. 결혼이 생애주기에서 당연한 절차로 여겨지던 때 결혼이 아닌 수도원을 선택했을 때 주위의 여러 지인들이 해준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결혼’과 ‘가족’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예전에 들은 충고(?)를 귀 여겨듣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거봐라, 그 길을 가지 않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야’ 라며 안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형성된 울타리이며 내 존재가 잉태된 곳이고 내 삶의 토대와 일부가 되어준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열렬히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의 변화무쌍한 21세기 사회 환경에서 다양한 변화와 여러 가지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결혼과 가족에 대해 알고 싶었다. 과연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 무엇이며 가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더 알고 싶었다.
미국의 가족 연구자인 스테파니 쿤츠의 『진화하는 결혼』은 이런 의미에서 매력적인 책이었다. 무엇보다 ‘결혼’의 역사적 과정과 의미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좋은 입문서였다. 방대한 결혼 역사를 담고 있기에 한 손에 들기 힘든 정도로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지만, 한번 읽기 시작한 책장을 덮기 힘들 만큼 흥미와 재미도 있었다.
<진화하는 결혼>은 총 4부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결혼은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바탕으로 공적으로 결합하는 제도라고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1부‘전통적인 결혼’에서는 역사적으로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 것은 18세기 이후에 급진적으로 등장한 결혼관 때문이라고 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여러 민족과 나라의 사례를 볼 때,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좋은 가문과 사돈을 맺어서 평생의 반려자를 구하고 자식을 낳아 가족의 노동력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역사가 기록된 이후부터 18세기까지 결혼 제도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결혼 당사자들의‘비이성적인’ 사랑의 감정과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둘 수 없었다. 결혼은 철저히 가문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고려하여 성사된 두 집안간의 투자였다. 결혼은 단순히 남녀의 결합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대, 지역, 민족마다 결혼의 형태, 의미, 규범, 기능, 문화가 달랐다. 그러므로 저자는 과거 결혼의 형태와 규범을‘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오늘날의 결혼에 투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한다.
2부‘정략결혼의 드라마’에서는 4천년 전 고대세계로부터 17세기에 이를 때까지 실행되었던 정략결혼의 역사를 살펴본다. 역사적으로 유럽, 동양, 중동, 남미 등 지역에 상관없이 지배계급에서 행해진 정략결혼의 주요 기능은 군사동맹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 정치권력과 거리가 먼 평민들의 경우에도 결혼은 개인의 만족과 행복보다 현실적 생존을 위한 노동의 동반자를 얻기 위한 경제적 계산의 문제였다.
또한 중세에 들어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집단이 되었으며 지배계급의 정략결혼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결혼, 이혼, 가족문제에 휩쓸리면서 교회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 상황마다 다른 태도를 취하는 등 결혼 전략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교회의 여러 가지 규칙들- 결혼 승인, 이혼 금지, 근친상간 금지, 일부다처 금지, 성직자결혼 금지- 등이 제정되면서 상류층뿐만 아니라 점차 평민과 하층민에게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중세 후반, 결혼을 규정하는 엄격한 법이 제정되고 강력한 이혼금지 규범이 제정되면서 점차 부부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을 3부‘사랑, 결혼의 돌연변이’에서 살펴본다. 시장경제와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사람들은 국가와 교회의 결혼 개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개인의 행복추구를 주장하면서 중매결혼 대신 낭만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을 하기 시작하였다. 쿤츠는 낭만적 사랑의 결혼에 내포된 결혼의 파괴적 특성을 설명하는데,‘사랑의 결합’을 강조한 결혼은 곧 이혼의 자유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집안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성역할이 구분된‘이상적’인 가족 형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와 지배계층에게 적합한 이상적 가족 모델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노동에 내몰리는 하층민과 노동계급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점차 이혼의 증가와 성별을 기반으로 한 위계질서가 무너지면서 성적 자유와 여성의 정치적, 개인적 해방의 물결이 거세졌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대공황,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1950년대까지 절정기에 달았던‘이상적인’가족의 형태는 이후 급속도로 위기를 맞았다.
긴 역사의 터널을 거쳐 현대에서 드러나는 결혼제도는 4부‘연애의 재앙과 보편적인 결혼의 붕괴’에서 설명한다. 쿤츠는 사랑이 기반된 이상적 결혼 모델이 서구에서 지배적이기까지 150년이 걸렸지만, 그것이 허물어지는 데는 2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결혼 패턴의 변화는 가속화되었고 남녀 모두‘전통적’인 가족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급격한 이혼율 증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피임약 개발로 인한 성 혁명으로 성적 자유까지 얻게 된 현대인들은 결혼의 중요한 기능으로 여겼던 자녀 출산도 개인의 선택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수천 년 동안 견고한 제도로 여겨졌었지만 반세기만에 그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현재 독신생활, 동거 커플, 미혼 임신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성역할 구분의 붕괴, 인간의 기대수명의 증가, 동성결혼에 대한 인식 변화 등으로 결혼은 사회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종말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쿤츠가 제기하는 문제는 결혼의 비제도화보다 가족의 변화, 성역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는 여전히 옛 방식을 고수하는 점이다. 결론에서 저자는 초강력 결혼혁명으로 인해 사회와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져 있지만, 결혼은 여전히 자신이 상대방에게 헌신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며 이 방법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우정과 존경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이 책을 통하여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은 낭만적 사랑의 개입과 안정적 제도로서의 결혼이 대치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사랑이 결혼제도에 들어가게 되면 이혼율이 증가하고 가정이 파괴된다는 것인데,‘사랑’이 모든 관계를 이어주고 더 성장시키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약속을 깰 수도 있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역설이자 딜레마로 다가왔다. 사랑이 결혼의 약속을 위한 필수조건처럼 인식된다면 더 이상 사랑이 없는 부부관계는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 낭만적 사랑의 결과로서의 결혼과 그 결과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결혼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애정을 종교적 교리와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접근했던 점들에게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또 다른 점은 교회가 결혼에 개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결혼은 교회에서 말한 성사로서의 혼인이다.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1] 중에 하나로써 혼인성사가 무엇이며, 혼인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정도였는데, 저자는 교회의 개입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한다. 가톨릭에서 결혼은 성사로 제정할 만큼 성스러운 일로 여긴다. 남성과 여성이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약속하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혼이 쉽지 않다. 혼인성사의 역사에 대해 가톨릭의 교리서를 찾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에서 성사론에 대해 공부한 신학자 신부님에게 ‘역사적으로 혼인으로서의 성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었다. 교회사에서는 혼인에 대한 최초 기록이 400년경에 있었고 12세기 롬바르드 시기에 혼인을 성사로 인정하기 시작했지만, 교회법 Canon으로 공식화된 것은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이다. 이 책에서도 12세기 중반에 파리 주교인 피에르 롬바르드의 주장에 따라, 결혼에 대한 동의가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받아들입니다’ 와‘나는 당신을 아내로 받아들입니다’라고 현재형으로 주고 받으면 그 결혼은 법적으로도 신성한 의식으로써 구속력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거쳐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21세기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현재의 결혼 형태가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져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인식의 폭을 넓히도록 해준다. ‘전통적’인 결혼모델이 그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어떠한 결혼 모델이 등장할 지 종교적으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책을 통하여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수확을 얻었다. 첫 번째는 통시적인 측면에서 세계의 각 나라와 민족의 사료와 예시를 통해 결혼의 기원, 역사, 가족의 형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다양한 변천사를 알 수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앞서 언급한 대로, 종교와 사랑이 결혼제도에 각각 개입되었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그로써 나타나게 된 결과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점이다.
이 책의 원제는 <Marriage, A History>이다. 한국어 번역은 진화하는 결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바로 역사로서의 결혼을 말하기에는 서구의 결혼 역사에 치중된 점이다. 쿤츠의 작업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깊고 가치 있다. 그럼에도 서구가 아닌 다른 문화권에 사는 인류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에게‘이것이 결혼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뉘앙스를 감지하게 된다. 1장의‘전통적인 결혼’에 언급된 유교 문화권이나 이슬람의 결혼 전통의 소개는‘특이점’만 부각시킨 전체 결혼사의 곁가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인류의 역사를 한꺼번에 기록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작업인 것처럼 인류의 결혼사를 정리하는 것 역시 그러하겠지만 결혼의 역사가 온전히 설명되기 위해서는 서구 이외의 문화권에서의 사료분석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이 간과한 많은 문화권의 학자들이 그들의 문화에서 결혼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고 현대에 어떠한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이 있어준다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media > 책 읽고 끄적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경계의 여성들-한국 근대 여성사』,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엮음 (0) | 2016.06.02 |
---|---|
서평:『조선조 사회와 가족-신분상승과 가부장제 문화』, 이이효재 지음 (0) | 2016.05.27 |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0) | 2011.07.24 |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0) | 2011.04.15 |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0) | 2011.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