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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철학

Sr.Julia 2007. 12. 7. 10:16
 

1. 윤리적 가치는 객관적인 것입니까? 주관적인 것입니까?

 윤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등을 판단하는 가치문제이며, 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를 연구하고 무엇이 바람직하고 선하고 훌륭한 삶인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윤리문제는 지식이나 정보 부족에서 오는 문제나, 선호도, 취향에서 오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문제들은 부족한 것들을 습득하고 선호하는 것을 얻고 취향이 맞으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윤리적인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가치의 충돌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윤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행위의 근거로 삼는 윤리적 가치가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인가 하는 것으로 윤리 실재주의와 윤리 상대주의 입장이 양극을 이룬다.

  먼저 윤리 상대주의에서 Emotivism은 윤리적 가치는 개인의 느낌이나 욕망, 기호, 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가치판단의 정당화는 불가능하며 절대적이지 않다고 본다.

 규범주의(Prescriptism)는 가치의 선악판단은 그 결과가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 이루어지며 인간에게 만족한 결과를 주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규범주의는 행위에 따른 결과를 중요시하는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적 원리로 내세우는 공리주의와 효용성을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하는 실용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한 사회 안에는 통용되는 가치규범이 존재하며 인간의 가치관은 그가 속한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사회라고 할지라도 세분화된 사회계층에 따라 다양한 가치 규범이 존재하며 시대와 장소, 연령, 문화 등에 따라서 사회적 가치도 달라진다는 이론이다. 

 이에 비해 윤리 실재주의는 윤리적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가치는 비물질적인 존재로써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오감뿐만 아니라 기억, 추론, 연상, 직관, 사유...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다만 이렇게 주장된 진리를 뒷받침하는 확실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인간 역사를 보면 믿었던 사실, 주장들이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론적 회의나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분석해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윤리적 삶의 경험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윤리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가치는 실체(용서의 실체)가 없다. 다만 용서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한다고 할 때 ‘용서’한다는 것은 그러한 윤리적 가치가 있고 그 가치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다.

 인간을 보편적으로 인격적 존재라고 한다.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이성과 자유와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며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한 것에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선악을 판단하고 책임을 질수 있는 주체자임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객관적인 윤리가치를 가진 윤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 윤리, 도덕, 실정법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고 어떤 체계를 이룹니까?

윤리와 도덕 개념에 대해서 특별한 구분 없이 동의어처럼 사용하는데 이 둘은 상호의존적 또는 상호보완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여 설명한다면, 윤리(Ethic)는 인간 사이의 인륜, 또는 이치라는 뜻으로 관습, 윤리, 법, 예식 등의 뜻을 나타내며, 도덕(Moral)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덕행의 길로 의지, 습관, 풍속, 규범, 특징, 행동, 행위, 제도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도덕은 공동체속의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하는 길을 걷는 것이며 실천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도덕 안에는 보편적인 가치로써 추구해야 하는 덕목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고 그 덕목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윤리는 왜 선하고 악한가? 왜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사유에서 출발하며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개념들을 내포한다.

또한 도덕이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개인의 체면과 양심, 동기와 수단 방법, 행위와 관련된다면, 윤리는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작용 안에서 적용되기 때문에 공동체적이고 객관적이며 공식적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윤리가 하나의 그릇일 때, 도덕은 그릇 속에 담겨진 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는 절대성의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변하지 않는다면 도덕은 상대성의 성격을 가지면서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정법과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

 도덕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수 있도록 규칙을 제공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우리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한계를 정해주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할 때 안내가 되는 원리들을 제공한다. 이처럼 도덕에는 근본적인 가치와 행동의 규범이 담겨 있다.

서양의 도덕원형은 십계명과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도덕법들이 신(神)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계명들은 실제적으로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종교의 힘이 약화되고 세속화 현상으로 신앙(십계명)이 인간의 가치판단에 있어서 더 이상 주도적인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계몽주의, 시민혁명, 인본주의 영향으로 사회계약설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모든 개인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이며 자유와 평등에 의거해서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법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국가는 특정한 목적(질서 유지)을 위해 각 개인이 국가에게 양도한 권력으로 모든 국민의 생명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 사회계약설에 의해서 실정법은 사회보존, 질서유지, 개개인의 행복유지를 최대화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최소한의 재제가 되었다.

사실 실정법의 대부분이 도덕에서 온 것이지만, 도덕을 어겼다고 해서 법적인 재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도덕과 실정법의 구분은 제도적인 재제의 유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3. “나는 왜 윤리(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

‘왜 나는 윤리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내게 윤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도록 한다. 윤리, 도덕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덕이며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규범들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와 도덕은 언제나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과는 반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

여기에 여러 가지 도덕이론들이 답을 하고 있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 왜 윤리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도덕적으로 행위 하는 것이 결국 자기들에게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의무론적 도덕이론에서는 도덕 그 자체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가장 단순하고 대표적인 형태는 십계명으로 이 계명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명백히 제시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도덕이론은 그 권위와 도덕의 근원을 하느님에게 두고 있으며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기억하게 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도덕원리에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덕원칙이 이성적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어느 곳에서나 일반적으로 그 도덕원칙을 따라서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따라서 신과 동일한 권위를 지닌 이성이 정당화한 도덕원칙이라면 그것은 강력하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

 공리주의는 현실 삶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결과주의를 주장한다. 도덕은 어떤 행동에서 결과가 좋으면 도덕적인 행동이고 결과가 나쁘면 그 행동은 비도덕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 의하면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규정하는 개념은 덕, 중용이며 그 덕은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 것은 사회전체의 행복, 공익에 이바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나는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 본질 자체에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 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며 그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에 있어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위험과 긴장을 수반하는 실존적 불안을 사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삶이 선한 것이고 어떤 행동이 악한 것인지 절대적으로 확실히 발견할 수는 없지만 선한 태도로서의 덕을 선택할 수 있다.

윤리적 객관주의에서 보듯이 자명하고 보편적인 윤리원칙을 발견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계 즉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윤리적 가치 즉 덕을 찾아 실천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상황윤리의 문제점들은 무엇입니까?

 죠셉 플레처는 도덕적 결단을 하는데 있어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상황주의의 세가지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율법주의는 모든 상황에서 행위를 결정할 때 일정한 법칙과 규제에 따라 결정하고 모든 사람이 이 법칙을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한다. 반면 무율법주의는 인간이 행동을 결정할 때 어떠한 원리나 법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그가 처한 그 순간(실존적 순간)에 맞도록 윤리적으로 행동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플레처는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를 반대하면서 상황주의를 주장한다. 상황주의는 윤리적 행위를 결정할 때 기존의 윤리규범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규범들을 변경할 수 있다. 다만 변할 수 없는 한가지 근본 법칙인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황윤리는 여러 가지 가치들이 혼재하면서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이 기준이 되지 못하며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들이 많은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개별적이며 다양한 상황, 특수한 상황을 존중하는 이론라고 한다.

 하지만 상황윤리는 특수한 상황성을 강조하면서 일반적인 규범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는 것과 예외적인 상황에 집중하면서 상황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 또 포괄적이지 못한 인간이해로 비판을 받는다.

 플레처는 정상적인 상황, 한계적 상황,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 중에서 한계적 상황에 집중한다. 이러한 한계적 상황에서는 기존의 도덕적 규범들이 답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규범의 상대적인 타당성을 주장하며 오직 아가페적인 사랑만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수단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상황윤리에서 말하는 상황은 도덕적 규범이나 실정법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 집중하면서 한계적 상황에 대항하여 제거하거나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을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즉 상황은 시공간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안에서 삶의 영역이며 자리이며 인간의 행위는 사회와 관련되어 발생한다. 그런데 한계적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떠난 상황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상황에 대해 협의적으로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상황윤리에서는 인간을 실존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여 인간 존재는 새로운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고 하느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결단을 내리는 존재로 이해한다. 하지만  기존의 규범윤리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보면서 권위가 있는 도덕규범에 인간은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인간으로 이해했다. 인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상황윤리의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개인 실존을 바탕으로 하는 실존주의적 인간관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가 어렵고 개인적인 윤리의 범주에 머무르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이해와 함께 존재론적인 인간이해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조셉 플레처의 상황윤리 문제점은 규범과 상황 중에서 상황에 더 가치를 두면서 야기된다. 규범은 대체적으로 어떤 경우에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한다면 상황의 문제에 있어서는 각자 처해있는 상황의 특수성의 문제가 중요시된다. 이렇게 윤리적 결단의 상황적인 특수성만을 강조할 때는 도덕적 규범의 기능과 그 필요성을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을 규범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타율적 존재로 파악하면서 타율적인 존재로 보는 규범주의자의 한계에서 인간을 실존주의적 구조에서 자율적인 윤리적 결단의 주체자로 보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갖게 했지만 인간 자율성만을 강조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존재론적인 인간이해와 실존주의적인 인간이해를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윤리적인 절대성이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가톨릭의 입장과 같은 관점이지만 사랑에 대한 이해와 접근방식은 다르다. 상황주의에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양심에 의해 사랑을 따르는 의향만 가지면 보편적인 도덕과 가치의 적용을 배제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사랑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 입장을 반대한다. 개인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도덕을 무효화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황윤리는 기존의 도덕규범이 답해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윤리적으로 답하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황윤리의 근저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적 의무의 부담을 거부하려고 하고 인간을 하느님과 동등하게 보려는 저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5. 윤리 의식의 확대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특수한 사람들에 대한 조건적인 사랑일 가능성이 더 많다. 내 가족이 다른 이들보다 우선이고 내 민족을 위해 다른 민족과 싸우게 된다.

 자비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마음이며, 배려이다. 자비가 현대 윤리학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윤리 의식을 확대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의식은 인간 중심적 윤리관이다. 창세기1장에서 이 세상의 생물들(식물과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

 하지만 자비의 덕목은 “생물 중심적 윤리관”으로 우리의 윤리의식 확대를 가능하게 해준다.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삶의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때 동물 학대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인식이 무생물인 하늘, 강, 물, 모래, 흙, 공기...등으로 확대될 때는 ‘생태주의 윤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의식이 초등학생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진보하듯이 인간중심적인 윤리의식에서 생태주의 윤리관으로의 윤리의식 확대도 가능하다.

 현대사회는 20세기를 거치면서 급속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생태계가 파괴되었고 이런 현상들은 생태계뿐만 아니라 전 인류, 전 지구에게도 큰 위기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이런 위기에 직면해서 생태주의적 윤리관역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적인 윤리관에서, 자연안의 모든 존재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포괄적인 윤리의식, 생태주의적 윤리의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나만, 우리 인간만을 강조하는 윤리의식이 아니라 상생의 원리에 따라 함께 더불어 살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 윤리의식 확대는 필요한 것이다.



기타>

1. 환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더 악화되기만 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포함해서 고대 플라톤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중용의 원리, 스토아철학, 스콜라철학의 윤리 그리고 칸트와 공리주의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윤리철학의 이론들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윤리의식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인간이 중심이었고 수많은 윤리이론들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 이론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행위하며 올바르게 살수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인간중심적인 윤리관들이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이 바탕이 되고 또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큰 것도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식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윤리관이다. 창세기1장에서 이 세상의 생물들(식물과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것들을 자신들의 소유물처럼 사용하고 지배해왔다.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슬러 근대 현대에 일어난 많은 사상들은 더욱 더 인간중심을 내세웠다. 급기야 神도 인간을 위해서 죽어야 했고 모든 세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강력한 인간중심 사회는 곧바로 물질만능주의, 과학기술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존재 스스로가 소모품이 되어버린 사회로 바뀌었고, 중요시 되는 것은 효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기술, 과학, 정보가 되어버렸다. 결국 윤리의식이 부재한 과학기술만능주의 사회가 되어버렸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모품이 되어버린 사회가 되었다. 그 결과 모든 환경과 생태계 역시 효용성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소모품으로 여겨졌고 결국 지금과 같은 환경문제를 초래하면서 파괴되었다.

 또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고대와 전통사회에서는 강력하고 보편적인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행동했고 사회가 움직였다. 하지만 근대, 현대에 이르러 점점 여러 가지 가치들이 혼란스럽게 대두되고 다원화되었고 뚜렷하고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가치규범들이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상대주의적인 윤리관들이 들어오면서 환경을 보는 상대주의적인 시각(특히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당장 보여지는 더 나은 결과만을 추구하는 경제논리에 집착하게 되었고 이로써 더욱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확대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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