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영성,묵상

볼품없는 하느님

Sr.Julia 2008. 4. 12. 11:47

유시찬 신부님의

대림특강 [볼품없는 하느님]에 대한 강의록

 

 

강론 제목: <볼품없는 하느님>

강론자: 유시찬신부님

장소: 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 2002년 12월 8일 일요일 12:00

<강론전 소개 말씀: 김정택신부님>

유시찬 보나벤뚜라 신부님은 법학을 하시고 강원도에서 등기소장까지 지내시다가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 감명을 받고 아주 뒤늦게 예수회에 입회하셨습니다. 당시 제가 지원장으로 임하고 있었을 때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죽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신부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일본 상지대에서 신학을 공부하시고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 선에 대해 깊이있는 공부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원 말씀의 집에서 일하시면서 영성수련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신 바 있습니다. 현재는 광주교구에 파견이 되시어? 영성수련회?를 설립하시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시고 계십니다.

<<볼품없는 하느님>>

자, 여러분 이 앞에 서 있는 저를 보시면 무엇이 보입니까? 맨먼저 이 흰머리가 먼저 보이시지요? 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무슨 얘기로 또 여러분을 호도(사기?치려고)하려고 할른지...염려가 됩니다. 오늘 이 강론은 다른 때와는 제게는 좀 다른 느낌이 옵니다. 제가 별로 강론할 때 아주 떠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조금 정서불안 현상을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제가 수사시절부터 가까이 뵙던 김정택신부님을 뫼시고 말씀을 드리려니 아무래도 정서불안 현상이 심하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 정서불안을 감추기 위해서 가끔 마이크를 들고 다니다가 졸고 계시는 분이 계시면 마이크를 들이대고 노래하라 하면, 옛날에 우리 같으면 마이크를 대면 당황하고 힘들어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벌로 생각하기는커녕 노래방 마이크로 생각해서...벌이 되지도 않으니...참...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긴 합니다.

각설하고, 오늘 저는 조금? 여러분에게 도발적인 제목 <볼품없는 하느님>이라는 제하의 대림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강론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영적여정을 돌아봄으로써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는 김정택신부님의 소개말씀대로 신앙에 있어서는 아주 늦깍이였습니다. 그것도 제일 처음에는 개신교인이 되었다가 다음에 가톨릭으로 방향을 옮겼습니다.

저의 영적여정은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무신론자 시기, 2단계는 개신교인 시기, 3단계는 가톨릭 1기로서 예수회에 입문하여 서품을 받기까지, 그리고 4단계는 가톨릭 2기로서 서품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단계마다 제게 있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관이 많이 바뀌어 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림기간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의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기간 동안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참되시고 힘있으시고 한결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즉,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갖다 붙여놓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존재를 완성시켜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고 고통과 죄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은 심하게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바른 하느님을 아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고 까지 생각됩니다. 이런 모습의 하느님은 실은 반쪽짜리 밖에 아니되는 하느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라면 왜 우리 사회에, 우리 안에, 가정 안에 왜 고통을 그대로 놓아 두십니까? 공의롭고 정의로운 하느님이시라면 왜 이토록 불의가 만연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말입니다. 도대체 이 고통들은 무엇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 안에 분노가 일고 화가 치밀고 한이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 잘못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반쪽자리 하느님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칠판에 음양의 태극을 그리시고 글을 써 넣으시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하느님은 밝은 면만의, 양의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우리가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의 어두운 면, 음의 하느님의 면을 잘 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陽은 강하고, 선하고, 참되고, 아름답고, 정의로움 등을 나타냅니다.

陰은 약하고, 어둡고, 죽음을 의미하고 악하고 추하기도 하고 불의하기도 한 면을 나타냅니다.

제가 그리스도교인이 처음 되었을 때에는 저 개인적으로는 철저히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세상 살아가면서 제 뱃속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는데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러다 가톨릭 1기에는 하느님 당신을 중심으로 제가 돌게 되는 그러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것처럼. 그러나 저의 생각과 생활이 이렇듯 하느님 중심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하느님은 여전히 강한 하느님이셨습니다. 수도생활의 3분의 1이 지나가고 있을 때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 이미지는 여전히 강한 하느님이셨습니다. 참으로 멋있고, 전지전능하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 스스로도 부단히 채찍질을 하면서 올곶게 수도자로서,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갈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이한택 주교님이 제 수련장신부님이셨는데, 그 분도 저희들에 대한 비젼이 크셔서 엘리트로 양성시키려고 애쓰셨지요. 저 역시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려고 참으로 애를 썼습니다.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그 나름대로 좋은 모습으로, 내적, 외적 발전을 해 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제게 걸림돌처럼 느껴졌던 것은,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두루,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회 밖에서는 물론이고 수도회 내에서 생활을 하는데도 수도회 형제들을 두루 사랑하게 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고민거리로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미운 녀석과 고운 녀석이 너무 구분이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밉게 보인 녀석은 아무리 이쁜 짓을 하려고 해도 밉게 보이고 고운 녀석은 못된 짓을 해도, 아무리 방바닥 x를 퍼질러 싸놓아도 이뻐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신부가 되려는 사람의 생각이겠습니까? 신부는 보편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되었습니다. 늘 이 차별없이‘사랑’하여함...이 화두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거룩하게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워낙 차별성이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문제로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이걸 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제는 예전 같으면 인간같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조금은 끌어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자락이 잘 안 바뀌는 것 같음도 느꼈습니다. 같은 예수회원에 대해서도 ‘어쩌면 저런 식으로 수도생활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가서 장가나 가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비판을 하고 단죄하면서 도통 사랑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사랑해야 되는데..’자책감을 떨굴 수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하여간 저의 이런 생각이 크게 바뀌게 되는 계기는 서품준비 피정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가톨릭 2기는 바로 이 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 피정을 하는데 기도체험을 통해서 그 계기가 왔습니다. 저는 대림시기에 말 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관상하였습니다.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장식 속에 환한 촛불이 따스히 비치는 구유...그 목가적인 분위기...그리고 대림시기에는 거리거리마다 캐롤이 흥겹게 울려퍼지고 연인들이 분홍색 사탕솜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재잘거리며 거리를 돌아 다니는 즐거운 광경이 연상되기 마련입니다. 눈과 귀가 즐거워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정기도 중에 제게 다가온 것 예수님은 말구유 안에서 누워 있는 그냥 핏덩이 같은 아기였습니다. 말 구유 안에 누워 응애응애 거리는 아이, 젖달라고 바락 바락 우는 아이, 악을 쓰며 우는 소리. 어미가 젖꼭지를 물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아기. 지구상에 던져진 가장 나약한 모습의 아기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핏덩이를 따라갈 거라고... 맹세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핏덩이를 내가 평생 사랑하고 따라갈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까? 피정 기간 내내 예수님의 울음소리가 저를 맴돌았습니다. 제가 사람으로 태어나시어 지극히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셨던 그 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약한 모습의 하느님, 약한 의미의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야심이 만만하게도, 김치국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서품받기 오래 전부터 서품받을 때 서품상본에 쓸 성경구절을 미리 단단히 정해 놓은 게 있었습니다. 꿈도 야무졌지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문구를 정해 놓았답니다. 그런데, 바로 서품 피정을 통해서 서품상본 구절을 바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야훼의 모습, 아무런 볼품도 없고, 멸시받고 구박받는 예수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의 병고와 아픔을 알고 짊어질 줄 아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 이후 하느님을 다른 각도로 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우시고 참된 것을 하느님이라고 하고 이것과 반대되는 악하고 추하고 거짓되는 것을, 그 반대되는 것을 다 몰아서 우리는 사탄으로 이름짓고 거기에 다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탄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렸던 예수님에 대한 관점을 고려해 보면, 이는 이런 모습의 하느님은 온전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반쪽짜리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사탄도 하느님 안에서의 사탄이 아닌가? 하느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사탄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 관점에서 이들을 나누어 놓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분리시켜 놓은 선 과 악은, 바로 음양의 논리처럼 함께 있을 때 완전한, 온전한 존재를 이루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밝음이 없으면 어둠이 없고 어둠이 없으면 밝음이 없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이 선하다면 악이란 개념도 없고 선이란 개념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남자만 있다면 남자와 여자의 개념도 없어질 것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있는 것이고 피조물이 전혀 없다면 더 이상 창조주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어떤 면으로는 서로가 맞물리고 기대고 있습니다. 선도 악에 기대고 있고 악이 없다면 선의 개념자체도 없을 것입니다. 즉 이 세상 논리에 의해 철저히 정반대되어 보이는 두 개가 하나로 결합되어 온전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하느님의 모습, 우주의 질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걸 모두 둘로 쪼개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쪼개고, 몸과 영혼을 쪼개고, 남과 여를 쪼개고, 자연과 인간을 쪼개고, 선과 악을 쪼개어 왔고 쪼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엇인가를 쪼개기 시작하면 반드시 가치의 우열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택하게 되고 좋은 것을 택하려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택하고, 몸을 택하고, 남자를 택하고, 인간을 택하고, 선을 택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 선택하지 않은 반대편은 없앨 수 있다면 없애 버리려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선한 것만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 나라로 완성될 것일까요? 이럴 때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음의 것을 다 바꾸어 나갈 때, 내가 아름다운 존재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순수한 우리를 지향하면서 쾌락을 취하는 부분을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온갖 갈등 속에서 허덕이고만 있게 됩니다. 저는 인간적 관점에서 이렇듯이 쪼개고 한 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 쪽을 없애버리려 하는 상황이 오히려 원죄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양면이, 철저히 반대되는 두 개가 결합될 때 완전한 하느님이 완성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 창조에 대해서, 그 첫 날에 어둠으로부터 빛이 생겨나라, 그 둘째 날에 하늘과 땅이 생겨나라, 셋째 날에 물과 뭍이 생겨나라, 넷째 날에 해와 달이 생겨나라 다섯 째 날에 밤과 낮이 생겨나라 그리고 여섯째 날에 남자와 여자가 생겨나라...고 하신 것을 보십시다. 매일 매일 창조하시고 나신 다음에 그 후렴구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하여 밤과 낮, 하루가 지나갔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하십니다.

밤과 낮은 상징적, 추상적 의미를 가집니다. 밤은 음을, 낮은 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밤만 있어도 아니 되고 낮만 있어도 아니 됩니다. 밤과 낮이 하루를 이룰 때 생명이 존재합니다. 어두움과 빛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생명이 존재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이 함께 하나로 어우러질 때 완전함이 존재합니다. 사람을 지어내실 때에도 우리와 닮은 사람을 지어내 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합된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수도자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수도자의 존재 의의는 거룩하게 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수도자가 된다고 해서 더욱 인격적으로 고매한 사람이 되거나 참된 사람이 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 보다 덜 그렇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자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인격적인 모습이 보이기는커녕 더욱 괴팍해지는 경우가 많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들 중에는 오히려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괴팍한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괴팍하다가는 오히려 일반 사회생활 속에서 견뎌나지도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서는 가차 없이 갈고 닦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수도회에서는 서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서로 더 감싸 안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로 더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해서 인지...그런 것들이 더 관용이 되어서인지 점점 더 자기 색깔이 강해지고 괴팍해지는 수도자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수도자의 존재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존재할 의의가 있기나 한가요? 수도자들도 남자, 또는 여자...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녀, 수사의 껍데기를 뛰어 넘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존재를 뛰어 넘는 존재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시킨 존재가 수도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합해서 부부가 되는 것은 과도기적 과정입니다. 어떻게 부부가 결합해서 하나가 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어떤 것인지를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 개 수도자가 인간적으로 제대로 잘 살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존재론적으로는 그들의 존재의의가 큰 것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 창조사업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모습이 선악과를 먹고 쪼개어져 즉,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는 과정을 통해서 선과 악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누고 악을 버려야하고, 선만을 취해야 한다는 개념 정립이 된 것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오류인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생애는, 예수님의 영적여정은 이를 통합하려 하셨던 삶이라고 보입니다. 이원 대립론적인 사고가 우리 안에 온갖 갈등과 아픔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이것을 하나로 묶으시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공생애 전체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부터 20절에,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리하는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죄인과 의인도 하나로 묶으시고, 자연과 인간도 하나로 묶으시고 라자로를 살려내시어, 삶과 죽음도 하나로 묶으시고 급기야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선과 악을 하나로 묶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사탄이 나의 발을 잡아서 끄집어 당겨서, 약한 내가 죄를 짓고, 악을 행한다고, 이렇게 얘기하면 듣는 사탄 진짜 섭할 겁니다.

내 안에 정반대되는 선한 기운과 악한 기운이 있는데 내가 생명을 온전히 잘 유지하려면 이들을 함께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악신을 훨씬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공헌을 생각해 봅시다. 붉은 악마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신명나게 놀았습니까? 축구 볼 때만 그럴 것이 아니고 평소에도 우리는 우리 안의 악신의 기운을 그렇게 볼 일 입니다.

부부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어떤 부부가 서로 너무 사랑해서 단 한 번 싸운 일도 없다고 한다면, 늘 모나리자 미소만 짓고 산다면, 이거야말로 가짜 관계입니다.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싸우지 않고 산다는 것만이 사랑이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착각하고 사는 것일 겁니다. 이는 외려 맹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자고 있는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강한 미움이 있을 때, 그냥 소리나지 않는 총으로 한 방 싸서 죽여 버리고 싶은 미움이 있을 때, 이런 악함이 내 안에 있더라도 이를 넘어서는 예민한 선한 기운이 있음으로 무미건조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훨씬 더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띤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에 있어서, 진정 사랑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미움이 있어야(있어야? 있더라도?) 훨씬 더 사랑이 생동감이 있습니다.

건강과 병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몸이 아프면 안 되는 걸로 생각합니다. 병이 걸리면 무슨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것으로 생각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잘 아프지 않아 본 사람, 감기한번 제대로 걸려보지 못한 사람의 건강에 대한 개념과 대수술을 받고 한 달 이상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가까스로 퇴원한 사람의 건강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누가 더 건강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알아듣겠습니까? 그렇듯이 실패를 맛 본 사람이 성공에 대해 알아듣는 깊이가 다를 줄 압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단순히 나쁘다고 없애려고 들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죄도 그런 식으로 바라봅시다. 우리는 대림시기에 판공성사를 받기 위해 나름대로 죄의 목록을 작성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통회합니다. 어금니 깨물면서 다시는 이 죄를 짓지 않겠노라 맹세맹세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고백성사 보고 돌아 나오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죄도 너무 그렇게 흉칙하게 보지 말고 좀 더 따뜻하게 봅시다. 제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는가? 염려하실 겁니다.

그러나 루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모습이 대별되어 들어납니다. 영적차원에서 작은 아들이 한 수 위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작은 아들이 한 수 위란 말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큰 아들 모습 쪽입니다. 말 잘 듣고, 죄 모르고, 성실하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존재에 대해 앎이, 알아들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끝간데 모르게 타락했었으나 오히려 아버지의 존재를 알아듣는 계기를 찾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택할 것입니까? (이는 죄를 의도적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찬송과, 아우구스티노스의 기도 중에? 오 복된 탓이여, 오 복된 죄여...라는 문구가 나오는 것을 보십시다. 중요한 것은 양과 음이 하나로 되는데 있다고 봅니다. 음과 양을 알아들음으로써 <태극의 생명>으로 나아간다고 생각됩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설사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이 죄를 발판으로 더 나은 사랑으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음양을 균형 있게, 하나로 깊이 있게 결합하여, 둘이 함께 나아가, 생명과 사랑으로 키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만 두고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입은 이뻐서, 예쁜 립스틱도 발라주고 그러는데 배설하는 항문은 지저분하다고 모른 척하지요. 그래서 항문이 없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고 관리를 안하면 이 항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이 옵니다. 변비가 조금만 생겨보세요. 피부가 엉망이 되고 열심히 가꾸어 놓은 얼굴이 푸석푸석해집니다. 이렇게 입과 항문이 함께 조화롭게 활동할 때 우리의 건강이 유지되고 생명이 유지됩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이 숨쉬는 것입니다. 숨쉬고 있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지요. 그런데 숨쉰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이 철저히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온전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균형을 이루는 것은 모든 존재의 모습이자 영적 여정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과 사건을 바라볼 때 음,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내 안에 있는 나쁜 기질, 없애고 싶은 기질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성인품에 올라야 하겠으니, 아니 복자품에라도 올라야 하겠으니, 철저히 내 나쁜 기질을 없애려하다가 내 자신의 좋은 부분까지 함께 없애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관점도 참된 선, 참된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참과 거짓을 끌어안고 계시는 가운데, 거기서 나아가, 참된 하느님은 그것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라고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참된 선함, 참된 아름다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안의. 성격의 결함이나, 선악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이 되었을 때 바로 이웃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알아듣게 되면 저절로 올바르게 나아가는 힘이 나오게 됩니다. 일치시키는 힘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분열이 아니고 통합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가? 그 힘들이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있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안에 이미 담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바로 우리 모습 안에도 갖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권능이 있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볼 때 참회하면서 미사를 시작합니다. "저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음란한 생각과 욕설을 뱉음과 끝없는 음식탐 등...에 대해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죄와 악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이것들의 창조의 근원지가 어디입니까? 생각과 말과 행위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가족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우주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이제 조금 있으면 강론이 끝나고 각자 다 갈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두 자매님이 돌아가시던 길에 누군가를 만나서, 오늘 유 신부 강론 들은 것이 어떻드냐는 질문을 받았다 합시다. 그에 대한 답이 어떤 것이 될까요? 강의내용에 대한 생각, 저에 대한 이미지...갑자기 강론 생각은 어디로 가 버리고, 유 신부 머리 하얀 것이 가장 강하게 기억에 떠오르면서 어떤 한 자매님은 자신의 첫사랑의 남자,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은 첫사랑의 남자를 떠올리면서 꿈속처럼 등불이 아름답게 비치는 그 옛 추억을 장소를 기억하면서 말할 겁니다. '아, 그래, 유 신부님 강론 참으로 좋았어...'하고 말입니다. 다른 한 자매님은 불행히도, 깊은 상처를 남긴 첫사랑의 그 남자가 떠오르자 입술을 질끈 깨물면 '그 x일 x'이라고 내뱉으면서 제가 아주 나쁜 이미지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 보나벤뚜라 신부는 여러분한테는 여러분들 각자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대로 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우주, 이 세상은 더 이상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피어있는 백합을 보더라도 각자가 보는 이미지에 따라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내 시각으로 바라본 창조물로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스스로가 창조한 세상 속에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그 마음이 그려내고 있는 것을 대단히 중시해야 합니다. 내 마음 그리고 내 생각 속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린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살린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 우리는 탄원기도를 드릴 때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위암 말기환자로서 많이 편찮으신데 치유시켜달라고 빌었는데 1년 뒤에 사망하셨다 합시다.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였는데도 데려가셨다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을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제 본인이 어머니를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생각 속을 더듬어 보아야 합니다. 의사가 일년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실거라 언급을 하였을 때 그를 믿고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히 어머니가 1년 뒤에 돌아가실 것을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상황을 결정하고, 창조하고 있으면서, 기도가 들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이걸 뒤집으려는 기도를 하는데 이게 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모든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창조해 놓은 대로, 창조해 가는 데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의 생각하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에 대해서 제가 책에서 본 얘기를 하나 하면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은 에모도 마사루라는 일본의 물 전문가가 지은 책으로 그는 물의 결정체 사진을 많이 찍어서 제시했습니다. 그는 물을 동결해서 사진을 찍는데 물에게 사랑스럽고, 예쁘고 이런 말을 해주면서 결정체를 만든 물의 결정체 사진과 물에게 미워...등등의 말을 한 물의 결정체 사진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글을 읽어 주거나 사진을 보여주거나 음악을 들려주면서도 그런 영향을 받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말을 들으면서 만들어진 물의 결정체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멋드러진 모습이었습니다. 나쁜 이미지가 제공되면서 결정체를 만든 경우에는 그 결정체가 흉물스럽게 만들어졌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듯 물을 놓고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물의 존재가 바뀌거늘 하물며 우리가 인간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따뜻하고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 몸이 생동감을 얻고 피가 온 전신을 기뻐 뛰어 놀지 않겠습니까? 웬만한 병은 그걸로써 다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걸프전쟁 당시 이야기입니다. 1974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바로 동경에서 수돗물로 만들었던 결정체가 엉크러지고 이상하게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날, 신문기사를 보니 그 밤에 이라크침공이 개시되었던 거랍니다. 바로 중동지역 걸프전쟁이 동경 수돗물에 영향을 준 것이다. 여러분도 종종 들으셨을 겁니다. 소위 북경의 나비효과에 대해서.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이것이 태평양 어느 곳 한 복판에 태풍을 일으키게 된다는 학설입니다. 이렇듯 의식의 차원과 물질의 차원도 하나로써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 사람, 자연 우주가 깊이 있게 하나의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하느냐에 따라 우주가 변하게 됩니다. 그 정도의 권능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바램에 따라 나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 사회, 지구가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이는 더 이상,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옛날에 영적으로, 직관으로 알았던 것들이 이제는 존재론적으로? 또한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한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게 된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로 깊이 결합할 때, 우리 일과 생각 속에서 그 안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면서 생명을 갖고 움직여 나가며 창조에 참여한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그에 정비례하여, 바로 우리 마음 먹기에 따라 우주가 바른 방향으로 변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