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성경,신학,교안

시원종말론

Sr.Julia 2007. 12. 2. 13:07
 

[시원 ․ 종말론]

<1> 시원론 (Protology)

1.  인간과 세상의 기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인간은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 자신의 기원에 대한 답을 갈구한다.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은 우주 만물의 기원에 대해 신화(神話, Myth, 미토스)와 철학적 사고, 과학적인 논증과 실험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 역시 인간과 자연의 기원을 묻고 그 답을 제시하는데 이것을 창조론, 창조교리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과 세상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이 창조는 연대기적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시작임을 말한다.

2. 구약성경의 창조신앙

 초기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창조주로서보다 계약의 하느님, 유일한 하느님으로 먼저 체험하였다.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바빌론 유배 중 또는 그 이후이다. 즉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주라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체험한 구원 행위를 통해서 얻게 되었다.

 창세기의 창조진술은 역사적 원인론 방법으로 바빌론 유배라는 현재 사실에서부터 과거의 출애굽, 가나안 정착, 성조들의 역사,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스라엘의 뿌리를 기술한다.

(1) 야휘스트 문헌 (창세 2,4b-25) : 야휘스트 창조설화는 BC1000-900년 것으로 솔로몬 시대로 소급되며 인간 존재, 죄, 축복과 은총 안에 구체화되는 하느님의 의지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드라마틱하게 서술되고 있다. 야휘스트는 직접적으로 인간 창조에 대해 다루면서 인간이 흙에서 창조된 것은 인간이 물질과 연결된 존재이며, 본질적으로 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는 창조행위로 인간존재로서의 생명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기인하고,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망과 하느님을 향한 경향이 밀접히 연결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두 그루의 금령나무는 인간의 한계성, 자유의 한계를 의미하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또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서로 동등하면서도 구별되는 관계를 드러내고 서로 보완해야만 완전한 인간상,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을 표현한다. 야휘스트 저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은 불순종부터 아벨을 죽인 카인, 하느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의 성적 결합, 바벨탑 건설의 네 개의 이야기를 통해 죄의 원초적인 모형을 설명한다. 그러나 악의 기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기 보다는 악의 현실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죄악과 대조하여 하느님의 배려와 은총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복수, 앙갚음을 하는 분이기보다는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재판 진행에 당연히 필요한 것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제관계 문헌 (창세 1,1-2,4a) : 제관계 문헌은 귀양후인 BC500년경을 전후로 바빌론에서 쓰여진 것으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창조되고 존재하며 믿음과 족보를 중시하고 설화를 교훈적으로 사용한다. 또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며 이로써 인간은 존엄한 존재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 부각시키고 제의적 공동체의 모습을 중요시 하고 있다. 그리고 제관계 문헌에서는 인간 창조가 그 정점에 있지만 하느님의 창조는 이렛날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완성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일곱째 날의 휴식에 암시된 영원한 휴식을 목표로 하며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창조의 완성으로 본다. 그리고 세상에 나타난 죄에 대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작은 집단과 계약을 맺으시며 창조의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세상에 제공하신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성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극복하고 승리하신다.

3. 신약성경의 창조신학

(1)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창조관 :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이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는 창조의 개념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설교의 전제로 이해하고 있다.

(2) 창조사상에 바탕을 둔 예수의 가르침 : 예수의 가르침과 설교의 핵심은 긴박하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전망을 담고 있지만 자연성과 육체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창조물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을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사려 깊은 아버지,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 용서하시는 분, 인간과 자연에 가까우신 하느님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옹호하는 예수의 선택은 존재의 가치를 강조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3) 창조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1) 바오로 서간에서의 창조신학 : 바오로 서간에서 말하는 창조이론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중보적 활동성의 의미로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고 있다. 즉 만물은 아버지를 향하여 존재하지만, 이 존재는 주님의 중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2) 요한복음 : 요한에게서 육화된 인격적 로고스는 하느님이 그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다. 따라서 이 로고스는 성부와 마찬가지로 창조주이다. 로고스의 적극적 활동은 “이 로고스를 통하지 않고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진술로 분명히 드러난다.

4. 근대, 현대 교회의 가르침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Dei Filius>에서 밝히는 창조론은 다음과 같다.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과 본질상 구분되며, 창조는 하느님의 온전한 자유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창조의 목적과 동기는 하느님의 영광 즉 하느님의 선성을 드러내는데 있다.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과 피조물의 자유행위로 빚어지는 것 까지도 당신의 섭리로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며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창조에 대한 조직적인 신학은 발견되지 않지만 그리스도론과 창조론을 연결하며 창조에 대한 성서적 전통을 잘 따르고 있다.


<2> 종말론 (Eschatology)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은 ‘마지막 것들에 대한 학문’의 의미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에 의해 인간과 세상의 역사에 시작이 있으며 또한 마지막도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당신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는 입장인 것처럼 종말론 역시 당신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또한 좋게 완성하시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기대하는 ‘희망론’이다.

1. 세상의 희망을 위한 종말론

(1) 희망의 계약 : 그리스도교 신앙이 물려받은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는 처음부터 희망의 역사였으며 이 희망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와 자손과 땅이라는 축복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출애급 사건으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에로 초대하시며, 하느님과의 특별한 친교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탄생, 새로운 계약, 평화의 나라 도래라는 내용으로 희망을 점점 확대하였다.

 이러한 희망의 성장은 역사적 체험에 뿌리를 두었고 예언자들은 희망의 근거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계속 상기시켰다. 하느님의 약속은 그 자체로 부르심이며 인간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초대하신다. 하느님 약속의 실현이라는 희망은 인간의 자유가 작용하는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2) 묵시문학적 희망 : 묵시운동은 BC 200-AD 100년까지 성행하였는데 이스라엘이 극도의 비관적 상태에 직면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희망이다. 묵시문학은 박해라는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익명이나 과거의 인물을 주인공을 설정하고 암호, 은어, 상징을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성경의 자의적이고 표상적인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인간 삶과 역사 전체를 총괄하시는 하느님이야말로 모든 창조의 미래이고 최종적 의미이며 목표라는 것을 진술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종말 사건에 관한 묵시적인 표현은 희망의 비유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묵시작품은 다니엘서이고 신약의 마르코 복음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러나 복음은 묵시문학에서 마지막 시기에 대한 추정이나 현실도피적인 경향, 정치적인 오해 등을 거부한다.

(3) 희망의 하느님 나라 : 성경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묵시적인 표현보다 기쁨과 안락함, 풍성함을 드러내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희망의 종말론을 진술한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전부였다. 이런 예수의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며, 부활사건 이후 교회 역시 그 희망을 이어받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하고 또 실현되어야 하는 나라이면서 ‘이미’와 ‘아직’ 의 긴장관계 안에 있는 나라이다.

(4) 희망의 그리스도의 재림 : 그리스도교 초기공동체부터 간절히 기대한 희망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재림)이다. 성경은 이 용어를 주님이 장엄하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심을 표현한다.

(5) 희망의 심판(공심판) : 인간은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영원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에서라도 선악의 시비가 가려지고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 부활과 새로운 세상을 요청한다. 그리스도교는 육신부활의 믿음을 통하여 전인적 인간의 구원을 주장하며 이것은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에 의한 것임을 드러낸다.

(6) 희망으로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것을 희망하며, 그분의 심판에는 자비와 용서가 앞서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것을 믿는다. 또한 전통 교리에서는 각 개인이 죽은 다음에 사심판을 받고 세상 마지막 날에 공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2. 개인의 희망을 위한 종말론

(1) 영원한 생명을 위한 관문으로서의 죽음 : 죽음은 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파괴인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결단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도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희망도 된다. 이러한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이나 영원한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한다. 또한 죽음은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나그네 삶의 완료로서 마지막 결단이지만 동시에 영원의 시작이기도 하다.

(2) 심판(사심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관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과 완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표현한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심판을 하느님의 선하심과 순수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심판은 우리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자유로워지는 정화의 순간이며 이 정화는 우리가 참으로 존재했어야 할 모습이 되게 한다.

(3) 정화(연옥) : 연옥(Purgatorium)의 진정한 의미는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열리는 것이며, 자신의 실재를 깨닫는 것이 고통이며 이 고통으로 정화되고 그로써 온전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연옥은 시공을 초월한 상태이며, 죽은 다음에 살아있는 동안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고통이나 다른 이의 보속, 대속을 통해 교정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4) 결정적 실패(지옥) : 예수의 메시지 안에서 지옥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심각성과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주권에 인간의 생사가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옥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 상실을 의미하며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환기하는 것이다.

(5) 천국 : 천국에 대한 희망은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된 이스라엘의 희망에서 싹튼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곁에서 이루는 완성 즉 구원이다. 성경에는 하늘, 새로운 이름, 혼인잔치, 잔치, 낙원, 새로운 도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내리라 라는 다양한 표현으로 천국을 상징하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을 총괄한다.

3. 마지막 완성, 미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사후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 부활을 근거로 하는 인간의 육신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 또한 죽은 자들의 전인적 부활과 죽음 후의 잔존하는 영혼이라는 실재, 교회의 장례예절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과 유효성, 장차 일어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 선택된 모든 사람이 맞이할 영광을 미리 보여준 성모마리아의 승천과 의미, 천국․연옥․지옥의 실존, 현재의 삶과 미래 삶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과 연속성 등이 그리스도교 종말론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내용임을 지적하고 있다.

<시원 ․ 종말론>을 배우고 나서

 시원종말론 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무한한 세상 안에서 지금 이 자리라는 시․공간 안에 존재가 있다는 감사로움이었다. 지금 이 자리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한, 경험될 수 없는 세상의 시작과 그 마침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라고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고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현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심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나의 생명이시고 사랑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체험하면서 그분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에페 1,4-5 참조) 마침내 이 세상 끝 날에 온전히 완성시켜주실 분이시라고 기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의 시작과 마침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진리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할 수 있는 존재(로마 8,24참조)로서의 평화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있다. 분명 이 관계 안에서 느끼게 되는 삶의 긴장감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면서 충만하게 하시는 하느님 현존으로 평화와 미래의 희망을 향해 자신을 투신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인간이 80년을 산다면 이제 기껏 그 반 정도를 걸어온 이 자리에서 세상의 시작과 마침을 짐작해본다는 것이 거대한 바다 속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이슬처럼, 영원(永遠) 속의 한 토막 꿈처럼, 무한하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티끌 같은 나의 존재를 던지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존재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탁하면서 시작이시고 마침이신 사랑하는 분과 만나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에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주겠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요한묵시록 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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